"팬들에게 사랑 받아야 진정한 프로배구"

프로야구와 프로축구는 봄에 시작해서 가을에 끝난다. 그리고 겨울에 접어들면 실내에서 하는 농구와 배구가 스포츠팬을 반긴다. 때문에 농구와 배구는 겨울을 대표하는 스포츠로 인기 경쟁을 해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농구 인기가 배구 인기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지난 01년 이후 삼성화재가 70연승을 기록하면서 5개 대회 연속 우승을 기록할 때부터다. 삼성화재 배구단의 독주가 계속되면서 배구 팬들이 차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지난 03년, 그가 한국 배구 무대로 돌아왔다.
이탈리아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승승장구했던 그의 등장은 단번에 많은 배구 팬들을 경기장으로 불러들였다.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감독 김호철(체육 80년 졸) 동문. 05~06 V리그, 06~07 V리그 연속우승에 이어 3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에 도전하는 김 동문을 현대 배구단 체육관에서 만났다.

키 작은 동양인 세터, 이탈리아 배구 무대를 평정하다.

체육관에 도착했을 때 김 동문은 선수단의 전지훈련을 위한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현대 배구단은 다음 달 9일 이탈리아로 전지훈련을 떠난다. 겨울리그가 시작되기 전 선수들의 훈련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김 동문이 제안한 전지훈련지다. 이번 전지훈련 장소인 이탈리아 트레비소는 김 동문이 감독을 맡았던 팀이 있는 곳이다. 김 동문은 선수 생활 대부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고, 감독 경험 역시 이탈리아에서 시작했다. 그런 김 동문이 이탈이아 땅을 처음 밟은 것이 지난 81년이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78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을 때 제가 주전 세터였습니다. 당시 한국 배구가 세계 4강에 올랐어요. 우리가 기억하는 월드컵 4강이나 WBC 4강보다 배구가 먼저 세계 무대에 한국의 이름을 알린 거죠. 그 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본 이탈리아 파르마 팀 단장이 직접 이적 제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세계 선수권 대회가 끝나고 김 동문은 이탈리아행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병역 때문이었다. 당시는 운동 선수의 해외 진출이 2002월드컵 직후 박지성, 이영표가 유럽에 진출한 것보다 더 어려운 시기였다. 그렇게 3년이 흘러갔다. 박기원 동문이 먼저 이탈리아에 진출했고, 조혜정 선수가 여자선수로는 처음으로 이탈리아 배구 무대에 등장했다. 그러던 81년, 구세주로 등장한 사람이 있었다. 가수 양희은 씨였다. 뜻밖의 사람이다.

“양희은 씨가 조혜정 선수 친구였어요. 이탈리아에서 조혜정 선수 통해서 제 이적을 진행하고 있었을 시기입니다. 조혜정 선수가 영어가 좀 서툴렀는데 양희은 씨가 중간에서 통역도 해주고 그랬나 봐요. 그동안 저도 병역을 마치고 대학도 졸업하고 그러던 시기에 다시 이적 제의가 들어온거죠. 주변에서 도와주신 분들 덕분에 이탈리아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탈리아 무대를 밟았다. 당시 파르마 팀은 2부리그 소속으로 우승을 차지한 경험이 없던 팀이었다. 처음 김 동문이 선수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구단 회장조차 “저 키작은 선수가 그렇게 대단한 용병인가?”라고 반문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온 키 작은 세터는 실력으로 대답했다. 김 동문이 팀에 합류한 첫 해 파르마는 2부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1부리그로 승격됐다. 승리 행진이 계속된 것이다.

“파르마에서 84년까지 선수로 뛰었습니다. 첫 해부터 3년 연속 우승을 했어요. 각 리그 우승팀이 겨루는 전체 유럽 리그 대회에도 이탈리아 대표로 나가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습니다. 축구로 말하자면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한 거죠. 우승 소식을 듣고 시민들이 시청 앞에 모여 환호성을 지르던 모습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김 동문은 낯선 이탈리아에서 살아남기 위해 실력으로 인정받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자신을 채찍질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고국을 떠난 지 3년이 지나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병도 깊어져 가고 있었다. 때마침 84년 LA올림픽 배구 대표 선수로 선발되면서 김 동문은 화려했던 이탈리아 생활을 접고 한국 무대로 복귀했다. 올림픽이 끝나고 현대 배구단 선수로 합류한 것이다. 그것이 김 동문이 기억하는 현대배구단과의 첫 번째 만남이다.

현대를 선택한 파르마의 황금 손, 아시안게임에서 애국가 울리다.

“안 그래도 한국에 돌아오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던 시기였는데, 딱 맞춰서 현대에서 이적 제의가 들어온 겁니다. 친구들도 보고 싶고, 가족들도 보고 싶고 그런 시기였어요. 현대에서 선수 생활하면서도 우승의 기쁨을 맛봤지요. 제가 좋은 팀, 좋은 동료 선수들 만나는데 복이 있나봅니다.”(웃음)

한국 배구 무대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는 김 동문을 이탈리아 배구 팀들은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현대 배구단이 실업배구 최강으로 군림하며 우승행진을 할 때다. 87년 다시 이탈리아 팀에서 이적 제의가 들어왔다. 파르마의 황금 손이라 불리던 김 동문을 기억하는 이탈리아 배구 팀은 많았다. 이적 경쟁이 치열한 만큼, 현대 배구단도 김 동문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현대에서 계속 붙잡았습니다. 한창 성적이 좋을 때고, 저 역시 현대에 애정이 많았어요. 하지만 한 번 더 도전해보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이탈리아 배구가 세계 최강으로 인정받을 때입니다. 다시 뛰어 보고 싶었어요. 단장님을 찾아가 부탁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단장님께서 ‘언제든 현대가 널 필요로 할 때 다시 돌아와라’고 말씀하시면서 허락해주셨어요.”

김 동문은 현대가 어렵고, 본인을 필요로 할 때 꼭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리고 95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선수 생활을 마치고 바로 감독으로 취임해 여러 팀을 지도했다. 선수뿐만 아니라 감독으로도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이탈리아에서 김 동문은 경기력뿐만 아니라 지도력도 인정받았다.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탈리아 배구 대표팀 상비군 감독을 역임했다. 상비군에서도 김 동문은 역시 김 동문이었다.

“상비군을 이끌고 유럽 대회에서 우승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시상대에 선수들과 나란히 서 있는데 국가가 연주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게 애국가가 아니더라구요. 이탈리아 대표팀이었으니까요. 이탈리아 국가를 듣고 있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제가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듣고 싶은 것은 애국가였습니다. 그 때 한국 무대로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03년 김 동문은 귀국 결정을 내렸다. 이번에는 선수가 아닌 현대캐피탈감독이었다. 그리고 그가 듣고 싶어 했던 애국가는 지난 해 도하아시안게임에서 배구 금메달을 따면서 들을 수 있었다. 야구와 축구가 아시안게임에서 일찌감치 탈락하며 자존심을 구긴데 반해, 대회 마지막 날 배구는 한국에 값진 금메달을 안긴 것이다. 김 동문은 대표팀 감독으로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었다.

“팬들에게 기쁨 주고 사랑 받는 그런 배구를 하고 싶다”

03년에 현대캐피탈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김 동문은 삼성화재의 연승을 막을 대안으로 평가받았다. 배구 팬들은 김 동문에게 침체된 배구 인기를 되살려주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지난 05~06 V리그에서 드디어 현대캐피탈 배구단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06~07 V리그에서 우승하며 2년 연속 우승컵을 지켰다. 그런 김 동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를 물었더니 의외로 대학 시절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77년인가, 제가 대학 3학년 때 일입니다. 당시에 실업팀과 대학 배구팀이 모두 참가하는 대회가 있었어요. 그 때 한양대가 대학·실업팀을 모두 물리치고 우승을 했어요. 대학팀이 처음으로 실업팀을 평정한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강만수, 이선구, 신춘삼, 김종범 선수 등 화려했어요. 우리 학교가 배구 명문이잖아요”(웃음)

자연스럽게 우리 학교라는 말이 나왔다. 모교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77년 대회에서 본교를 우승으로 이끌고, 78년 세계 선수권대회 4강 신화의 주역이었으며, 파르마의 황금 손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김 동문. 이제는 3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에 도전하는 그에게 이번 시즌 목표를 물었다. 우승팀 감독으로서 당연히 우승이 목표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처음 현대캐피탈 감독을 맡았을 때는 우승이 목표였습니다. 그래도 배구 명문 구단인데 우승을 목표로 뛰었지요. 하지만 한 해, 두 해가 지나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프로잖아요. 실업팀이 아닌 프로팀의 목표는 단순히 경기에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팬들이 많이 찾는 팀을 만드는 것이 올해 목표입니다. 아니 앞으로의 목표예요. 가장 잘하는 팀보다는 가장 인기 많은 팀, 가장 많은 팬이 사랑하는 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열심히 해서 우승컵도 지켜야지요”
김 동문은 우승이라는 목표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프로 팀이 나갈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김 동문은 선수들에게도 같은 말을 한다고 말했다. 현대 배구단의 선수들 역시 전정한 프로 선수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그에게 한양인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인생 선배이자 대학생 자녀를 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여유와 끈기로 무장한 창조적 지도자를 꿈꾼다”

“저도 대학생 자녀를 둔 아버지 중 한 사람입니다. 지금의 젊은 층은 굉장히 창조적이고, 우리 세대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 중 많은 부분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은 부러운 면도 있어요.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런 창조적인 부분을 꾸준히 실행해 나가는 노력이 약간 부족해 보여요. 너무 급변한다고 해야 할까요? 무슨 일을 하든지 좀 더 느긋하게 끈기 있게 한다면 더욱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무대에 복귀한지 이제 4년이 되어가는 김 동문. 그가 삼성화재가 독주하는 배구판도를 깨고 새로운 강자로 자리매김한 것도 끈기와 노력이 뒷받침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끈기와 노력은 선수생활부터 꾸준히 길러온 김 동문만의 장점으로 기능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현대캐피탈 배구단 감독이 아닌 배구인 김호철의 목표를 물었다.

“예전에는 은퇴하고 김호철 배구교실같은 걸 만들어서 배구 저변확대에 기여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좀 바뀌었어요. 내가 감독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몇 년 일하다 보니까 새로운 배구 지도자들을 육성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잘나서라기 보다는 제가 가진 노하우들을 전해주고 싶어요. 선수 관리하는 방법에서부터 연습계획 짜는 것까지 제가 먼저 배운 부분들을 전해주는 것도 한국 배구 발전에 일정부분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더 훌륭한 지도자가 나오지 않을까요?”

3년 연속 우승에 도전하는 현대캐피탈 배구단, 3년 만에 우승컵을 되찾아오겠다는 삼성화재 배구단, 박기원 감독 선임과 함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LIG 배구단, 그리고 5년 연속 드래프트 1순위를 뽑으며 젊은 선수들을 보강한 대한항공 배구단까지. 올해 배구 V리그가 더욱 흥미진진해 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겨울이 되고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배구 코트를 찾아가 보길 추천해본다.

글 : 장기진 취재팀장 jyklover@hanyang.ac.kr
사진 : 김기현 사진기자 azure82@hanyang.ac.kr


학력 및 약력

김 동문은 지난 80년 본교 체육학과를 졸업하고 81년 이탈리아 배구에 진출했다. 파르마, 트레비소 팀 등에서 선수로 활약했으며, 95년 선수 생활을 은퇴한 이후, 라벤다, 트리에스테 팀에서 감독직을 역임했다. 78세계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86년까지 배구 국가대표 주전 세터로 활약했으며,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 멕시코유니버시아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지난 해 도하아시안게임에서는 대표팀 감독을 맡아 우승을 차지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선수 시절 이탈리아에서 최우수 외국인선수상,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06년 KT&G V리그 감독상을 수상했다. 현재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감독을 맡아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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