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인 사람이 돼라"

‘연인이여’, ‘에어시티’, ‘내 이름은 김삼순’, ‘명랑소녀 성공기’, ‘구미호’, ‘사랑을 그대 품안에’ 그가 출연한 드라마와 영화 중 몇 개를 고른 것이다. 함께한 주연 배우들도 화려하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인물들. 90년대 초 연극배우로 데뷔, 지난 94년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로 브라운관에 데뷔한 이후 끊임없이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권해효(연극영화 92년 졸) 동문. 약방의 감초처럼 인기 드라마에 어김없이 나오는 권 동문은 요즘도 시트콤 <코끼리> 촬영으로 한창 바쁘다. 세상에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그는 뚜렷한 정치적 소신을 갖고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연기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일산 MBC드림센터에서 촬영 중인 권 동문을 만났다.

“학연보다 중요한 것은 학풍(學風)”

사람들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면 으레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이름이나 나이, 직업, 고향이 바로 그것. 특히 그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출신학교’다. 같은 학교 출신일 경우 더욱 정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그러나 권 동문은 학벌·학연에 치우쳐 일을 그르치는 것을 무척 경계했다. 사람이 능력으로 평가 받아야지 출신 학교에 좌우돼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면서 학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학교만의 학풍이라는 사실도 힘주어 말했다.

“늘 고민하는 게 학연주의예요. 사람을 처음 만날 때 학교를 묻는 게 싫습니다. 학연보다 더 중요한 게 학풍이라고 봐요. 그렇다고 모교가 싫다거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항상 자랑스러워요. 학과 교수님과도 꾸준히 교류합니다. 지난 주에도 은사님 정년퇴임 관계로 한양대에 헌정 공연 다녀왔어요. 제가 학부 다닐 때 지도해 주신 분인데 정년퇴임하신다고 해서 제자들이 공연을 준비했어요. 시트콤 <코끼리> 촬영하고, 헌정 공연도 준비하느라 바빴습니다. 학풍은 곧 그 학교의 분위기인데 얼마나 학생들이 주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스스로 공부할 환경을 조성해 나가려는 노력이 학벌보다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학풍은 꾸준히 후배들에게로 넘어가니까요.”

학연주의보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학교의 분위기라고 강조하는 권 동문. 그는 평소 세상에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는 말을 강조했다. 누구나 정치적인 견해를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연기자 생활 외에 남는 시간을 이용해 시민사회단체와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그는 얼마 전에도 호주제 폐지, 여성가족부 존치를 위한 1인 시위 등 사회참여 활동에 적극 나섰다. 그런 배경에는 연기자가 공인이 아닌 사인이라는 권 동문의 소신이 자리 잡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연기자는 공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은 조금 다른데요. 연기자는 공인이 아닙니다. 공인은 말 그대로 공적 이익을 위해서 일하고, 국민의 세금을 받아 생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공적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거죠. 연기자는 그렇지 않아요.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개인 사업자예요. 연기활동 외에 시민단체와 일하는 사회 참여는 일종의 의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공동체 사회에 대해 관심 가져야 해요.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봅니다.”

“작가의 글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재현할 수 있는 것이 배우의 매력”

공동체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사회 참여에 적극적인 권 동문. 그의 말처럼 기자 역시 연기자는 공인이라고 생각해왔다. 공적 이익을 대변하지 않음에도 ‘유명하면 공인’이라는 등식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권 동문은 또한 사회 참여의식을 가질 것을 강조하면서 취업 준비에 여념 없는 학생들도 진정한 학교의 주인이라는 주인의식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각종 투표참여도 적극 권했다.

“사회를 잘 둘러보면 소수자가 많아요. 단순히 숫자가 적다는 것 외에도 목소리가 작고 힘이 약하면 소수자라고 봐요. 여성이 대표적인 경우죠. 과거에 비해 권익이 많이 향상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힘이 약합니다. 공동체 사회에서 참여는 세금을 내는 것 같은 일종의 의무죠. 내가 여기 살고 있으니까 여기의 주인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주인은 학생, 학부모, 교수예요. 학생들이 매년 수업 일정을 짜거나 교수를 선택하는데 있어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학교 안에서 이뤄지는 학생회장 선거나 자치단체장, 국회의원, 대통령 선거에도 내가 주인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적극 참여해야 되요.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게 대학생의 의무자 특권입니다.”

학생들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와 주인의식을 강조하는 권 동문. 그의 학창시절은 어땠을까. 80년대 중반, 대학가는 반독재를 위한 학생운동이 정점에 올라있었다. 특히 본교는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불렸다. 권 동문은 남들처럼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는 대신 연극 공부에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어릴 적 시상식에 선 배우들의 수상소감을 들으면서 연기자의 꿈을 키워온 그는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면서 차츰 연기에 눈을 뜨게 됐다.

“누구나 한 번쯤 배우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나요? ‘내가 시상식에 선다면 어떨까’라는 그런 생각 말예요. 배우란 그런 것 같아요. 어떤 작가가 쓴 글을 자신만의 상상력을 통해 재현해 내는 거잖아요. 그게 어렵다는 건 알지만 얼마나 즐겁고 가슴 벅찬 일입니까. 그렇게 배우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다가 대학에 들어왔는데 당시 학교는 최루탄 가스 냄새가 일상화됐고, 학생운동이 정점에 이른 시점이었어요. 저는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대신 제 일을 열심히 했어요. 매일 과제하고, 연극 공부하고, 한양 레퍼토리 단원 활동도 하면서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요즘 학생들이 더 치열하게 지내는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배우는 학문에 대해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합리적인 행동하는 합리적인 사람이 되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또한 그렇게 열심히 했기 때문에 지금의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권 동문이 존재하지 않나 싶다. 실제로 그는 대본을 잘 외우는 배우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감정이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는 감정적인 직업 연기자. 권 동문은 이와는 반대로 배우는 합리성이 가장 요구되는 직업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합리적인 사람을 좋아한단다.

“배우라는 직업이 그래요. 감정이 중요한 감정적인 직업인데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가장 적합한 행동을 해야 하는 합리성이 필요한 직업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합리적으로 이뤄진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부터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가령 옆집하고 싸움이 났을 때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가족 편을 듭니다.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가족이니까 감싸고도는 거죠. 우리 가족이 잘못했으면 먼저 나서서 사과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가족이 다른 사람과 싸우고 있을 때 이성적으로 잘잘못을 따진다는 게 쉬운 행동은 아니다. 그만큼 합리성을 강조한 그의 말에서 지금까지 사회가 얼마나 합리적이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됐다. 권 동문의 취미는 다양하다. 시간이 날 때면 음악을 즐겨듣고, 혼자 혹은 가족과 시장을 보러 다닌다. 그는 주로 남대문, 동대문 시장을 비롯해 주로 재래시장을 즐겨 찾는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고 다가와 귀찮을 법도 하지만 사람들에게 자신을 친근하게 여겨줄 때 행복하다고 말하는 권 동문은 시간이 흘러 은퇴하게 되면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여행을 하고 싶다고 넌지시 이야기 했다.

“대중문화 예술인이 각자 갖고 있는 위치나 성격이 있어요.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스타가 있는 반면 길을 가다가도 쉽게 손 내밀고 인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죠. 제 경우는 후자입니다. 이 직업은 사람들이 알아봐주고 반가워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할 수 있어요. 절대 귀찮다고 생각 안합니다. 배우는 비정규직이고 자영업자예요. 퇴직금도 없고 언제든지 휴가도 낼 수 있어요. (웃음)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이 철저하게 적용되는 곳이 배우라는 세계죠. 세월이 흘러 은퇴를 하면 어딘가 여행하고 다니는 사람이었으면 해요. 제가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하는데 카메라는 두고 가고 싶어요. 여행하는 순간 풍경을 놓칠 수 있으니까요.”

글 : 정 현 취재팀장 opentaiji@hanyang.ac.kr
사진 : 권순범 사진기자 pinull@hanyang.ac.kr


학력 및 약력

권 동문은 지난 92년 본교를 졸업하고 94년 MBC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로 브라운관에 데뷔했다. 이후 숱한 드라마와 영화, 연극에 출연해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아졌다. 주요 출연작으로는 단편극 ‘말이 씨가 되면’(1991), ‘사랑을 그대 품안에’(1994), ‘진짜사나이’(1996), ‘미스터 큐’(1998), ‘선물’(2001), ‘명랑 소녀 성공기’(2002), ‘구미호 외전’(2004), ‘내 이름은 김삼순’(2005), ‘무기여 잘 있거라’(2006), ‘에어시티’, ‘연인이여’(2007) 등이 있으며 드라마, 영화, 연극을 넘나드는 연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 권 동문은 또한 지난 98년 SBS 연기대상 우수조연상을 수상했다. 현재 MBC시트콤 ‘코끼리’에 진상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열연하고 있는 그의 향후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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