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동문이 뛴다 28

 "사랑의 끝은 육신의 죽음 아닌 추억의 소멸"

 160만 관객 울린, 충무로의 어린 왕자


'연애소설' 이 한 감독 (연영 88)

 

 '너무 아파요. 그런데 계속 아프고 싶어요.' 영화 속에 세 주인공은 마치 릴레이라도 하듯이 이렇게 말한다. 너무 아파서 계속 아프고 싶은 기분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마이크로웨이브가 수 분 만에 뱉어내는 인스턴트 식품들처럼 요즘 우리의 만남과 이별은 너무도 쉽다. 만남에서부터 50일을 축하하고, 100일을 꼭 기념해야할 만큼 우리의 사랑은 몇 번의 계절을 넘지 못하는 짧은 감정의 소모품이 되어버렸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아픈 기분이 생길라치면 그는 이미 새로운 사람에 두근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치는 낯선 인연들은 늘 금속성의 생채기를 남기고 간다. 상처로 가득한 도시에 분홍빛 러브바이러스를 퍼뜨린 사람, 가을의 복판에서 연애소설의 이한 감독을 만났다.

 

 유치해지지 않고서야 네가 낭만을 알랴?

 

   
 

 일군의 비평가들은 영화 '연애소설'을 놓고 한국판 '러브레터'니, 내용이 너무 신파적이니, 등장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가 지극히 유치하다는 등 혹평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들이 무색하게, '연애소설'은 이미 전국 16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수많은 관객들의 옷소매를 적셨다. 총과 칼로 무장한 '어깨' 아저씨들이 난무하는 스크린을 비집고 이른바 유치찬란한 '연애소설'이 승승장구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슬픔이 웃음처럼 허공으로 사라지지 못하는 까닭은 눈물에는 웃음이 갖지 못한 질량이 있다는 말이 새삼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하다. 촌스럽고 어눌하지만 '사랑'으로 무장한 젊은이들을 앞세워 영화는 속삭인다. '가을에는 사랑하세요.'

 

 "처음에 사장님을 만나서 '이 영화는 흥행은 안되겠지만 배우가 좋으니까 망하지는 않겠죠'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 영화가 이렇게 흥행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유치하다고도 하는데 유치한 것이 비단 나쁜 것만은 아니죠. 개인적으로 유치하다는 말을 너무 좋아합니다. 우리가 어른들에게 유치하다고는 하지 않잖아요. 유치하다는 말은 어린 아이의 모습에서 나온거죠. 내 영화가 유치하길 바랍니다. 내 영화가 꾸밈없는 아이를 닮아 있길 바랍니다"

 

 아직도 남의 집 벨을 누르고 도망가는 장난이 하고 싶을 때가 있다는 이한 감독은 세상이 조금만 더 유치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너무 어른들만이 사는 세상이 되어 간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 빨간 장미를 사랑한 어린왕자가 먼저 떠올랐다. '아직 칭찬에는 안 익숙한데…….' 영화에 대한 짧은 찬사에 이 감독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얼굴을 붉힌다.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한 영화가 보여준 순수의 밀도가, 그의 얼굴에도 숨김이 없이 드러나 있다. 한 명의 어린왕자가 지금 내 앞에 있다.

 

 "영화는 '러브레터'가 아니라 '소나기'를 모티프로 만들었습니다. 첫 작품에 대한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왔는데 그 때는 영화 '러브레터'가 만들어지기 한참 전의 일이죠. 어려서 소설 '소나기'를 한 두 번 읽었는데, 어른이 된 후에도 가끔씩 그 소설의 느낌들을 떠올리면 감정적으로 순화가 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 느낌의 영화를 만들어서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도 유행에 타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성공한 걸까요?"

 

 '입봉'이 '대박', 삭제 장면은 여전히 아쉬워

 

   
 

 많은 연인들이 애틋한 시간을 함께 하기 위해 분주히 극장을 다녀가지만, 정작 감독들은 영화를 찍느라 바빠서 제대로 연애도 못한다는 그의 고백이 안쓰럽다. 아침 6시에 모여서 준비하고 9시 정도에는 실제 촬영에 들어간다. 야간 촬영이 있는 경우에는 꼬박 밤을 세고, 24시간 내내 촬영을 하는데 제작 기간 내내 대부분의 나날이 그러했다는 설명이다. '잠은 언제 자느냐'라는 상투적인 질문에 '촬영 끝나고 집에 가서 자요'라고 대답하는 그의 모습이 애처롭다.

 

 "너무 힘들었어요. 선배들 얘기를 들어보면 특히 신인감독은 피를 한 바가지나 쏟는다고 했어요. 초짜가 배우와 스탭들까지 수 백명의 사람들을 관리해야 하니까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다고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죠. 특히 크랭크 인 10일 전부터는 거의 한숨도 잘 수가 없었어요. 긴장감으로 먹은 것은 다 토하고 신경쇠약에 빠졌죠. 크랭크 인 당일에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도저히 걸어갈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거울을 보니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아서 사람들이 저를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을 정도니까요."

 

 모자를 쓰고 갈 것인지 썬글라스를 쓰고 갈 것인지 한참 고민했다는 그의 말에 영화를 위해 고군분투했을 그의 지난 시간이 떠올라 일순 숙연해졌다. 촬영이 모두 끝나고, 개봉 뒤 관객들의 호응을 지켜보면서야 긴장이 조금씩 풀리고 있노라고 그는 덧붙인다. 이른바 '입봉'작에서 '대박'을 터뜨린 감독으로서 그 떨림을 어찌 쉽게 잊을 수 있을까 싶다. 그러나 이미 개봉한 영화에 대한 아쉬움은 모든 감독들에게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이 감독은 말한다.

 

 "제가 좋아하는 장면은 상영시간 문제로 다 잘랐습니다. 영화를 다 찍고 편집했더니 2시간이 넘더라구요. 지환이의 현재 모습, 지환이의 어머니와 가족관계 같은, 보다 정서적이고 세밀한 스케치들, 우리 일상의 모습들을 그대로 보여주려고 했죠. 돈을 적게 들이고 제가 만드는 영화라면 모두 넣었을 텐데, 저 혼자만이 아닌 관객이 좋아해야 하니까 눈물을 머금고 잘랐습니다."

 

 알코올... 필름... 그리고 나그네 파전

 

   
 

 이 감독이 처음부터 영화감독이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자연계를 선택했던 그가 정작 원서를 쓰려니 하고픈 전공이 없더라는 것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오랜 동안 생각하다가 그것이 음악과 영화인 것을 알았단다. 연극영화과는 자연계열의 과목에 한 과목만 추가로 시험을 보면 지원이 가능했고 '이곳에 가면 적어도 재미는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원서를 넣은 것이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 것. 재미있겠다 싶어 전공을 선택한 희대의 낭만주의자답게 학창시절에 대한 물음에 '필름'과 '술'이 전부였다는 대답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학창시절은 술과 영화, 그것이 전부였죠. 제 동기 중에 감독들이 많습니다. '해피엔드'의 정지우, '와니와 준하', '비천무'의 김영준, '로스트 메모리즈'의 이시명 감독 등이 모두 동기들입니다. 교수님들이 '너희들은 영화를 참 열심히도 찍는다' 하실 정도로 서로 배우도 하고, 조명도 하고, 감독도 하면서 작품들을 찍었어요. 이렇게 몇 작품만 해도 한 학기가 훌쩍 지나곤 했죠. 그리고 술을 마시고……. 그게 학창시절의 전부입니다. 단골 술집이요? '나그네 파전'을 즐겨 갔었죠."

 

 이 감독은 대학 졸업반 때부터 광고회사에 몸을 담고 직장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우연한 기회로 배창호 감독 밑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다시 영화계로 복귀했다. '러브스토리', '정' 등은 그가 연출부로 땀을 흘리며 '입봉'을 준비한 작품들이다.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작품 구상을 하는 스타일인지라, 지금껏 써놓은 시놉시스며 시나리오만도 수 십여 편. '연애소설'은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랜 나이테를 두른 작품 중에 하나다. 향후 '오즈의 마법사'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을 생각하고 있지만 '연애소설'처럼 흥행의 성공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고. 만약 감독을 시켜주지 않으면 만두집을 하고 싶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그의 얼굴이 해맑기 그지없다.

 

 사랑의 끝은 육신의 '죽음'이 아닌 추억의 '소멸'

 

 영화 '아멜리에'를 너무도 감명 깊게 보았다고 말하는 이 감독에게 '이상형'을 물었다. '웃는 여자는 다 예쁘지 않나요?'라는 싱거운 반문이 되돌아온다. 영화 '연애소설'은 감독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그려진 작품으로 알려지면서 더욱 화제를 모았다. 2002년 가을, 수많은 청춘의 심금을 울린 '연애소설'의 실제 주인공은 과연 누굴까?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사는 여자가 아니었어요 과 친구의 생일이라 안양에 갔죠. 그곳에서 만났어요. 이름이 수인이었죠. 일행을 버리고 그 여자를 쫓아갔어요. 비밀이 많은 여자였죠. 전화번호도 없고, 만나려면 그 여자가 먼저 전화를 해야만 했죠. 그 사람이 너무 좋아지는데 전화번호도 가르쳐 주질 않고, 자기 정체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말라고 하더군요. 다섯 번쯤 만나고 화가 나서 조금 다퉜는데 이후로 연락이 없었어요.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지금도 보고 싶어요."

 

 스무 살 때의 인연을 잊지 못해 지독한 가슴앓이를 했던 그가 생각하는 '연애소설'의 결말은 슬픔일까? 행복일까? 그는 '연애소설'은 단연코 '해피엔딩'이라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진정한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아련한 추억으로 승화되기를 바란다는 것이 감독의 설명이다. 한 동안은 주인공 지환이 슬픔에 고통스러울지라도, 시간이 지나고 어느 따뜻한 날이 오면 지환에겐 그것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닌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것. 눈물을 흘린 많은 관객들에게 그가 남긴 말이 있다. 참된 사랑의 끝은 육신의 '죽음'이 아닌 추억의 '소멸'이라고.

 

김자영 취재팀장 apriljy@ihanyang.ac.kr
사진 : 이재룡 사진기자 ikikata@ihanyang.ac.kr

 

 

 학력 및 경력

 

   
 

 이한 감독은 1988년 본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배창호 프로덕션에서 연출부로 '러브스토리', '정' 등의 작품에 참여하다, 2002년 영화 '연애소설'로 감독으로 데뷔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장이모 감독을 좋아하며 영화와 음주를 자신이 할 줄 아는 두 가지 일이라 소개한다.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한 데뷔작 '연애소설'은 아련하면서도 밝은 톤의 멜로 드라마로 지난 10월 13일을 기준으로 158만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 석관동 자택에서 아직 독신의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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