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르포] 2007 고구려 문화유적 기행
2,000년 전 고구려의 숨결을 느끼다
2007-08-01 인터넷 한양뉴스
삼국 시대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고구려는 그동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가 천년 고도로 추앙받을 때도, 무령왕릉의 발견으로 백제가 새롭게 주목받을 당시에도 멀리 북한과 만주세력을 아우르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던 고구려에 대한 관심은 한 걸음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부족한 사료도 한 몫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주몽’에 이어 ‘연개소문’이 드라마로 방영되면서 고구려 역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고구려는 수나라, 당나라 등 중국의 통일 국가와 맞서 싸우면서 우리 민족의 기상을 널리 알린 국가였다. 그런 고구려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50명의 한양인이 중국으로 향했다.
1. 첫째 날 : “고구려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첫 방문지는 비사성이었다. 고구려가 당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었던 천리장성의 일부다. 한 시간 여를 걸어 올라간 끝에 비사성 입구에 도착했다. 적의 침입을 감시했던 망루와 장군이 전쟁을 지휘했던 전망대가 남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군대를 지휘하는 장수의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해발 663m에 위치한 둘레 길이 5km의 성벽은 당나라의 침입을 막은 고구려의 최전방 전선이었다. 멀리 있는 적까지 감시할 수 있도록 지어진 망루는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옛날, 고구려인의 기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렇게 중국에서의 첫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2. 둘째 날 : 고구려의 숨결을 느끼다.
국내성은 북벽 일부만 그 형태가 남아 있었다. 관리가 잘 되지 않아 현지 안내인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칠 뻔 했다. 국내성 근처에는 적이 쳐들어 왔을 때 대항하기 위해 만든 산성인 환도산성이 있었다. 서문을 제외하고 3면이 험준한 산으로 막혀 있어 적이 침입하기 힘든 천혜의 지형이었다. 진흙과 돌을 이용해 쌓은 산성은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있어 고구려인의 높은 건축기술을 엿볼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환도산성이 중국의 문화 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 돼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게다가 우리가 가는 곳마다 중국 공안이 따라붙어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우리의 역사인데, 우리의 유적인데 중국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사실에 언뜻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환도산성에 이어 장수왕릉을 찾았다. 위압감이 느껴질 만큼 거대한 장수왕릉은 한 변의 길이가 31.58m인 바른네모꼴이며 높이가 12.4m다. 1100여 개의 돌을 사용해 만들었으며 돌의 무게만 1900여 톤에 달한다는 설명에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특히 각 변에 3개씩 호석이라는 걸 세워 돌이 밀려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고 있었다. 태자로 책봉되면서 짓기 시작했다는 장수왕릉은 오랜 치세 기간 만큼이나 거대하게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근처에는 장수왕이 선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광개토대왕비가 세월의 흔적 속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교과서 속 사진에서만 보던 광개토대왕비를 보는 순간 그 크기와 웅장함에 한참을 놀랐다. 백두산 천지에서 가져온 돌에 1775자의 글씨를 새겼다는,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가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을 맞으며 한양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지 안내인 조춘호 씨는 “광개토대왕비에는 고구려의 탄생에서부터 광개토대왕의 업적까지 방대한 기록이 고구려인의 웅장한 글자체로 새겨져 있다”고 말했다. 기자의 키보다 훨씬 더 큰 광개토대왕비를 보면서 당시 고구려의 강력한 국력을 새삼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어서 고구려시대 봉분으로 유일하게 묘실 내부를 들어가 볼 수 있는 5호분 5회묘를 찾아갔다. 실내는 어두웠지만 현지 안내인이 등을 비추는 곳에서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었다. 또한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벽화가 벽면과 천장에 그려져 있어 고구려인의 미적 감각도 엿볼 수 있었다. 묘의 주인은 왕족이나 귀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중국 방문 이틀째, 한양인은 집안시에서 2,000년 전 고구려인의 숨결을 마음껏 느낄 수 있었다.
3. 셋째 날 : 백두산 천지에서 한양을 외치다.
전용 버스에서 내리자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들었다. 눈 앞에 보이는 1300여 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천지가 있다는 말에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 시작했다. 지대가 높아서인지 금방 숨이 가빠온다. 그래도 천지를 포기할 수는 없는 법. 30여 분을 걸어 올라간 끝에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언젠가 텔레비전 CF에서 보았던 백두산 천지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모두들 할 말을 잊고 사진기를 꺼내 천지의 모습을 담기 위해 바쁜 모습이었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산이자 압록강과 두만강, 송화강의 근원이라는 백두산. 그 웅장한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담기 위해 한양인들은 오래도록 자리를 뜨지 못했다.
천지의 모습을 사진에 담은 후, 제자하로 향했다. 제자하는 지진 활동으로 땅이 갈라진 틈으로 물이 흐르는 곳이다. 두 개가 있어서 쌍제자하라고 부른다. 이어서 찾아 간 곳은 금강대협곡. 금강대협곡은 용암이 분출되어 만들어진 V자 형태의 계곡이다. 용암이 만들어낸 기이한 형태의 괴석들이 계곡 아래에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코끼리, 호랑이, 사람 얼굴 형상 등 다양한 모습들을 찾아 보는 재미까지 더 해졌다.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長白山)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백두산에 있는 상점에서 파는 손수건에는 한글로 백두산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물론 그 위에는 한문으로 장백산이라는 글자가 더 크게 쓰여 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진행하면서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어 가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백두산을 찾는 한국 관광객 수입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손수건에 백두산과 장백산이 동시에 쓰여 있는 이유다.
4. 넷째 날 : 비류수 강, 고구려 역사의 시작.
해발 820m 정상에 도착했다. 그런데 안개가 산을 덮어 버렸다. 백두산 천지를 허락했던 중국의 날씨는 오녀산만큼은 허락하지 않았다. 덕분에 주몽이 나라 터로 삼았다는 비류수강은 정상에 세워진 사진을 보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다. 오녀산성 안쪽에는 아직도 당시에 사용했던 연못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연못 근처에는 당시 사용했던 병영의 주춧돌만 남아 있었지만 그 크기와 형태에서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은 비록 이끼가 가득 낀 상태지만 그 옛날 주몽이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는 수도에 있는 중요한 산성으로 기능했던 곳이다.
다시 버스로 5시간을 이동했다. 이제 버스 타고 서너 시간 이동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첫 날 묵었던 단동으로 돌아왔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있음을 자축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끼리 조를 짜서 중국 땅을 밝은 지 4일 만에 학생들은 어느새 친해져 있었다. 술잔이 오가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학생들을 인솔해 온 김계곤(학생처) 학생지원과장은 “이동거리가 길어서 고생한 점도 있지만 학생들이 잘 따라와 준 것에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면서 “고생한 만큼 보람도 느끼고, 많은 것을 배우는 문화유적 기행이 됐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5. 다섯째 날 : “다음에 또 만나요”
대련국제공항에 도착했다. 4박 5일 동안 같이한 현지 안내인 오준화 씨는 “대학생들을 안내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말하며 “학생들이 예절바르고, 친근하게 대해줘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 것 같다”고 전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오 씨는 다음에는 통일이 돼 평양에서 만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면서 떠나는 학생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인천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이륙했다. 강한 바람을 타고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인천국제공항에 한양인을 내려 주었다. 이번 고구려 문화유적 기행을 기획한 서울캠퍼스 총학생회 기획단장 권병준(인문대·영문 4) 군은 “준비기간이 짧아서 걱정을 했지만, 대학생만의 열정과 패기로 모든 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면서 “더 발전된 문화 유적 기행을 준비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모두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기의 ‘찰칵’ 소리와 함께 4박 5일 간의 “2007 고구려 문화유적 기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취재를 마치고
대륙은 넓었다. 인천에서 시작해 대련, 단동, 집안, 통화, 서파를 거쳐 다시 통화, 환인, 단동, 대련에서 인천으로 돌아오기까지 총 이동 거리 3,000Km. 하루 평균 버스 이동 시간 6시간. 게다가 낯선 음식과 언어, 불편한 화장실까지. 하지만 한양인은 멈추지 않았다. 고구려 문화 유적을 찾아 가는 한양인의 발걸음은 언제나 힘이 넘쳤다. 그리고 문화 유적지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처음으로 실시된 “고구려 문화유적 기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제 제 2, 제 3의 문화유적 기행을 꿈꿔 본다.
장기진 취재팀장 jyklover@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