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인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석좌교수

아프리카의 빽빽한 열대우림에선 광합성을 위한 식물들의 극한 경쟁이 펼쳐진다. 이 가운데 덩굴식물 라피도포라(Rhaphidophora)는 조금 특별한 생존 방식을 보여준다. 나무 꼭대기의 잎사귀들이 스스로 제 몸에 구멍을 내 아래쪽 잎사귀들로 햇빛을 내려 보내주는 것이다. 햇빛을 골고루 나누기 위한 식물의 자기희생이다.글 강현정ㅣ사진 이서연
 
▲ 최형인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석좌교수 

제자들에게 징검다리 되어주고파


배우의 자리는 무대 위지만, 스승의 자리는 무대 뒤다. 배우는 조명을 ‘받는’ 사람이지만, 스승은 제자들을 향해 그 조명을 ‘비춰주는’ 사람이다. 톱스타의 스승으로 널리 알려진 최형인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며 밀림 속 라피도포라가 떠오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찍이 한양대 동문극단인 <한양레퍼토리>를 창단한 것도, 몇몇 졸업생들과 의기투합해 내리사랑 장학금을 조성한 것도, 아래쪽 잎사귀들에게 햇빛을 내려 보내주고픈 정글 속 라피도포라와 너무도 닮아있기 때문이다.
“우리 졸업생들에게 일종의 징검다리를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연극과 교수들은 학생들이 졸업할 때가 되면 늘 미안하거든요. 나가서 돈벌이가 안 되니까. 미국 예일대학에 보면 예일 레퍼토리 컴퍼니가 있는데, 그게 너무 부러워서 저희도 하나 만들었죠.”
국내 유일의 대학 동문 극단인 <한양레퍼토리>의 탄생 배경이다. 1992년에 창단한 <한양레퍼토리>는 매년 질 높은 공연을 선보이며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졸업생들에게 훌륭한 무대를 제공해줬고, 덕분에 많은 졸업생들이 방송이나 공연 현장으로 바로 캐스팅되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사랑이 많으면 일이 많다 


‘사랑이 많으면 일이 많다’ 한양대 교수로 부임하던 날부터 지금까지 쭉 최형인 교수의 연구실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글귀다. 사랑이 많으면 다른 사람의 아쉬운 사정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고 일일이 돕다보면 바빠질 것이니, 인생을 밀도감 있게 잘 살라는 의미로 친언니가 써준 글귀라고 한다. 사랑이 많아 제자들의 어려운 사정이 눈에 더 밟힌 걸까. 최형인 교수는 지난 2011년부터 학과 발전기금으로 총 6천5백만 원을 기부해왔다. 그중 5천만 원은 ‘연극영화학과 내리사랑 장학금’ 명목으로 기부했는데, 이 장학금은 최 교수가 몇몇 졸업동문들과 의기투합해 만든 장학기금이다. 설경구, 박미선, 홍석천, 정일우 등 연예인 동문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1억 2천만 원이 넘는 기금을 조성했다. 비단 장학금만이 아니다. 대학로에서 ‘밥 아줌마’로 불릴 만큼 제자들에게 밥을 해먹이며, 고집스러울 만치 지독하게 연습했던 시간들은 이미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가치를 훌쩍 넘어선다. 사랑이 많으면 일이 많다 했는가. 제자들의 시시콜콜한 사정까지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스승의 마음이 결국 ‘내리사랑 장학금’으로 탄생한 것이다.
“우리 과가 연극 전공이 한 100명 되는데, 진짜 멀리서 다니면서 힘들게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거든요. 이 돈이 그 아이들에게 편안한 차비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고, 조금이라도 여유를 갖고 공부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고, 매일매일의 삶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앙상블일 때 가장 아름답다 


앙상블(Ensemble)은 ‘함께’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주로 음악에서 두 사람 이상이 연주하는 합주 혹은 합창을 가리키는 용어다. 비단 음악뿐이랴. 최 교수에 따르면 연극은 앙상블이며, 우리 인생도 앙상블이 되어야 아름답다고 한다.
“연극을 가르치면서 제일 강조하는 게 휴머니티(Humanity)예요. 우리는 막이 오르기 전에 이미 예술을 하는 거예요. 서로 도와주고, 서로 안아주고, 힘들 때 위로해주고, 그렇게 부대끼는 게 연극이에요. 나를 보여주려고만 하면 그것만큼 미운 게 없어요. 앙상블이 될 때 연극은 가장 아름다워집니다.”
잎사귀에 구멍을 내 햇빛을 공유하는 라피도포라처럼, 스승의 내리사랑으로 제자가 자란다. 스승은 ‘키워냄’으로 인생의 앙상블을 완성해간다.

 
저작권자 © 뉴스H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