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인권운동가 강철환 동문(무역ㆍ93)

북한 함경남도 요덕 수용소. 북한의 악명 높은 정치범 격리시설이다. 그곳에서 북한은 무자비한 인권유린을 자행했다. 이 사실은 지난 1992년, 이 수용소를 탈출해 온 탈북 청년에 의해 폭로됐다. 그 탈북 청년은 강철환 동문(무역·93)이다. 고(故) 백남 김연준 박사 덕분에 우리대학에 입학해 새 삶을 시작한 강 동문. 졸업 후 조선일보 북한 전문기자를 거쳐 북한 인권운동가로 헌신하고 있다. 그는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넘기고 도착한 남한에서 ‘남북통일’의 꿈을 위해 정진하고 있다.

 

수용소에서의 10년, 그리고 탈북

 

   

강 동문은 1968년 평양시에서 태어났다. 당시 강 동문의 집안은 북한에서도 상류층에 속했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강 동문. 하지만 위기가 찾아왔다. 김일성-김정일 세습통치를 반대하던 할아버지가 반역자로 몰려 국가안전보위부에 끌러갔다. 가족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온 가족이 함경남도 요덕군에 위치한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됐다. 당시 강 동문의 나이는 9살. 어린 나이부터 시작한 수용소 생활. 수용소 생활은 지옥과 같았다. 굶어 죽고 맞아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간수들의 구타가 일상화 돼있는 곳. 12시간 동안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학교 역시 수용소 안에 있는 특수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그곳도 지옥이긴 매한가지다. 선생님에게 질문만 해도 얼굴에 주먹이 날아왔다. 그리고 오후에는 아이들에게 노동을 시켰다. 그곳에 인권이란 말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지옥 같은 수용소 생활, 그곳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수용소에서 나온 강 동문은 대학에 가리라 결심한다. 하지만 죄인 집안의 몸. 일류대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공부를 할수록 강 동문은 점점 북한사회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유학을 갔다 왔던 친구를 통해 남한을 비롯해 다른 나라의 정보를 알게 됐습니다. 북한사회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반정부 그룹을 조직했다. 남한 방송을 청취하고 남한노래를 불렀다. 김정일을 비난하는 발언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문에 국가안전보위부에 적발돼 수용소에 재수감되는 위기를 맞게 된다. 이번에 잡히면 그대로 처형되는 상황. 강 동문은 탈출을 결심한다. 친구와 함께 일단 중국 국경행 열차를 탔다. 그곳에서 군인들에게 뇌물을 주고 교대시간을 알아냈다. 때는 새벽 2시, 경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차가운 겨울 강을 건넜다. 국경을 건넌 다음에는 도망자 생활이 시작됐다. 중국에 잠입해 있는 북한 정보기관의 눈을 피해 다녔다. 약 6개월 간의 도망자 생활 후 그는 대련에서 출발해 인천으로 가는 밀항선에 탑승했다. 그리고 인천에 도착해서 그는 꿈에 그리던 남한 땅을 밟게 됐다.

 

남한에서 시작한 새로운 삶

 

   

새로 시작하는 남한 생활. 강 동문은 우리대학 무역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설립자인 김연준 박사의 힘이 컸다. “김연준 박사님께서는 북한 인권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북한에서 온 저를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죠.” 북한과는 다른 생활. 가장 다른 것은 자율이었다. “북한에서는 시키는 것만 하고 살아야 합니다. 수강신청도 대학에서 정해줄 정도죠. 반면에 남한은 개인이 어떻게 먹고 살지 스스로 정해야 했어요. 처음에는 이런 문화가 익숙지 않았고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북한과는 다른 남한의 언어 때문에 강 동문은 과제 제출조차 쉽지 않았다. 그때마다 강 동문을 도와준 것은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습니다. 함께 어울려 같이 놀기도 하고. 엠티도 가고 농활도 갔죠. 덕분에 남한의 생활에 더 쉽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 후, 그는 한국전력에 취직한다. 회사생활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 동문에게는 꿈이 있었다. 북한민중과 그들의 인권에 대한 일을 하고 싶었다. 입사 후 3년, 그는 일을 그만둔다. 그리고 인연이 닿아 그는 조선일보에 북한전문기자로 입사한다. “많은 언론에서 저를 인터뷰 했었습니다. 근데 만일 내가 직접 북한에 대한 것을 쓰면 더 진실성과 사실감을 가지는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

 

기자 일은 쉽지 않았다. 새벽부터 아이템을 생각해야 했다. 특종 경쟁도 치열했다. 게다가 아직은 전문적으로 글을 쓰기에 한국어 실력도 부족했다. 3년 동안 죽자 사자 일했다. 4년 차부터 자신만이 쓸 수 있는 기사가 나왔다. 요덕 수용소의 위성사진을 처음으로 입수해 폭로하기도 했다. 탈북자 기자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은 것. 북한의 내부사정을 아는 자신의 장점을 이용, 북한 권력구도에 대한 전문 기사를 쓰기도 했다.

 

기자 생활을 하던 2005년, 강 동문은 당시 미국의 조지 부시(Bush)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그의 수용소 회고록을 읽고 감명을 받은 부시 대통령이 강 동문을 초청한 것. 강 동문은 백악관에서 40분 간 부시 대통령과 북한 인권에 대해 담화를 나눴다. “원래 예정됐던 시간은 10분 정도였습니다. 예정했던 것보다 4배나 더 오래 만났죠. 전례가 없는 일이라 더군요. 당시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인권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탈북자의 입장에서 북한의 민주화 전략에 대해 조언했죠.”

 

북한 인권 운동가로의 길

 

   

2007년 강 동문은 북한전략센터를 개관하고 본격적으로 북한인권 운동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강 대표는 북한전략센터를 통해 다양한 활동으로 북한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통일 후 북한에서 자유언론을 만들기 위해 탈북 청년을 대상으로 기자 아카데미 프로젝트를 미 국무부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 글을 쓰는 훈련부터 시작해 탈북 청년들이 훌륭한 언론인이 되도록 돕는다. “북한에는 자유언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탈북한 북한의 청년들을 모아 통일 후 북한에서 자생적으로 자유언론이 생겨날 수 있도록 기자들을 육성하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북한의 탈북 청소년과 남한의 청소년들이 만나는 자리인 ‘통일 컨설트’, 북한에 대한 세미나 및 연구사업, 북한 인권에 대한 활동을 주로 하고 있다.

 

또한 북한사회의 내부가 민주화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강 동문의 역할이다. 북한으로 남한의 드라마나 영화가 담긴 USB를 꾸준하게 보내고 있다. 이를 통해 남한에 대한 정보를 알려 북한 민중들에게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특히 강 동문은 북한 민중의 변화가 통일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역설했다. “북한 사회가 자체적으로 민주화를 이룩하지 못하는 이유는 공포정치의 포악성과 통제 시스템 때문입니다. 외부정보에 대해서도 차단돼 있으니 이것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는 거죠. 이집트나 리비아가 민주화를 이룩하는 과정을 보더라도 외부의 정보를 통해 체제에 대한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남한방송과 드라마를 담아 중국을 통해 북한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강 동문은 이런 문화교류가 통일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북한 주민들은 전혀 남한에 대해 모르고 통일을 하게 되면 많은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문화교류를 통해 미리 남한에 대해 경험하게 되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러면 사회 갈등도 줄어들고 통일에 드는 비용도 감소할 수 있습니다.”

 

인권에 대한 관심이 통일을 이끈다

 

강 동문은 북한에 쌀을 주는 것보다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이 통일을 앞당기는 일이라 말한다. “북한은 모순이 가득한 정치체제 입니다. 북한에 쌀을 줘봤자 그것이 민중들에게 가지 못하고 기득권층의 배만 불려주는 꼴이죠. 북한민중들의 생활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요. 옛날 독일이 통일할 때 동독주민이 서독을 선택한 것도 서독이 쌀을 줬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독이 동독주민들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진 덕분이었죠. 동독정부가 국민들에게 인권유린을 하지 못하도록 서독정부가 압박했지요. 인권유린을 하지 않는다는 대가로 경제원조를 했습니다. 덕분에 동독 주민들이 서독을 신뢰할 수 있었고 덕분에 독일의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죠. 우리도 북한주민들의 자유와 인권을 상승시키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북한민중의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죠.”

 

강 동문의 꿈은 북한의 민중이 남한의 국민들처럼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통일 후에는 남한과 북한이 서로 화합할 수 있도록 도울 계획이다. “이제 김정은 체제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곧 북한 체제의 한계가 오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통일 후 남한과 북한 두 국민들이 서로 화합할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또한 강 동문은 후배들에게도 북한주민들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통일에 대한 꿈을 가지라 말했다. “통일은 우리나라에게도 새로운 기회입니다. 대륙으로 이어지는 철도가 뚫리게 되고 내수시장이 확대되는 가능성이 열리는 거죠. 통일은 곧 현실이 됩니다. 통일에 대한 꿈을 가지고 통일 이후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한다면 미래에 대한 꿈도 구체적으로 보이리라 생각합니다. ”

 

 

 

   

학력 및 약력

 

강철환 동문(무역.93)은 1968년 평양시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반역자로 몰리자 강 동문은 9살의 나이로 요덕수용소에 끌려가 10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했다. 수용소에서 나온 후, 북한정부의 모순을 느끼고 반정부 활동을 했다. 반정부활동이 북한정부에 적발되자 강 동문은 친구와 함께 탈북을 감행한다. 6개월의 도망자 생활 끝에 남한에 도착했다. 이후 우리대학 무역학과에 입학, 졸업 후 한국전력공사, 조선일보에서 일했다. 2000년 수용소 생활을 담은 책 ‘평양의 어항’을 불어판으로 출간했다. 이후 영어를 비롯한 다양한 언어로 번역됐다. 한국어판은 2003년에 출간됐다. 2007년부터는 북한전략센터를 개소해 북한 인권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손경원 학생기자 son7629@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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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민 사진기자 marie91@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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