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 산업사회의 마비된 비판 회복과 인간 해방의 가치 담아내
우리는 기계를 돌려 자동차를 만드는 한편 인터넷을 통해 안방에 앉아 루브르 박물관의 예술품을 감상한다. 우리는 지금 산업사회의 종착역에 서서 각자 탈것을 마련해 탈산업사회로 향하여 달려가고 있지만 누구도 이 역을 벗어난 사람은 없다. 새로운 사회, 정보화사회에서 인간은 어떤 위상에 놓일 것인가? 자유로운가, 억압되어 있는가? 더 풍요로운가 빈곤한가? 탈산업사회, 정보화사회에 대한 담론이 무성하지만 장밋빛 일색이다.
![]() | ||
그러나 테크놀러지에 관한 기술이 대부분이고 인간과 사회에 관한 기술은 빈약하다. 탈산업사회를 좀더 자유롭고 행복하며 건전한 사회로 이끌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술이 발전한 것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고도 산업사회의 테크놀러지가 어떻게 인간의 억압과 소외를 심화하고 있는지, 이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에 대해 예리하게 해부한 사회철학서이다. 이것이 바로 케케묵은 낡은 책을 오늘 다시 권하는 이유다.
정우성이 나오는 삼성카드 광고를 보면서 광고 기획자의 의도대로 연봉 1억이 넘고 한 달에 3, 4백만 원을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기꺼이 소비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삼성카드를 쓴다면 문제는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연봉 2천만 원도 되지 않는 선한 샐러리맨이 이 광고의 이미지에 취하여 소비를 하다가 파산하여 결국 막다른 길에 몰려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실상은 가난한 노동자인데 자신을 그 광고 속의 정우성과 같은 이로 착각하여 카드를 마구 사용하며 일상의 행복에 탐닉하며 사회나 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다면 그 사회는 과연 건전한 사회인가?
노동자가 주말에 고용주와 같이 흔들의자에 앉아 캔맥주를 마시며 월드시리즈 야구중계를 보고 있다면 그는 그 순간 자신을 중산층으로 동일화한다. 실제의 경제적 조건은 노동자이지만 중산층의 소비문화에 가담하면서 그는 자신을 중산층으로 착각한다. 그는 자신을 중산층으로 보기에 사회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획득하고 있는 부의 박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도 산업사회는 여러 가지 기제를 통하여 대중들이 기존체제에 대하여 반역할 힘을 거세하였다.
![]() | ||
이렇게 반역을 향한 동경을 거세당한 채 소외와 억압의 늪에서 헤매고 있으면서도 '사이비 행복'에 젖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꿈조차 꾸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현대인, 일차원적 인간의 초상이다. 그러기에 마르쿠제는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다시 해방되기 위해서는 아직 덜 길들여져 에로스의 동력을 갖고 있는 학생과 국외자들이 사회변혁의 횃불을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외쳤다. 이 소리는 서구 대학생들의 가슴을 울려 독일에서, 프랑스에서, 미국에서, 일본에서 스튜던트 파워의 물결이 서구 탈산업사회 체제를 강타하였고 이것은 아직도 미진(微震)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의 외침은 결국 꿈으로 끝났고 물론 마르쿠제가 잘못 인식한 부분도 없지 않다. 위성통신과 개인컴퓨터의 보급 등 탈산업사회는 혁신적으로 달라졌기에 마르쿠제의 논의는 분명 수정을 요한다. 그러나 산업사회, 탈산업사회를 비판하는 도구로 마르쿠제의 이 책만큼 예리한 비평서는 없으며 그의 비판에 공소시효란 있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