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올해의 교육인상' 정병호 교수(국문대ㆍ문화인류)
1970년대부터 시작된 급격한 산업화. 맞벌이 부부가 늘어났다. 부모의 돌봄 없이 자라는 아이들도 많아졌다. 딱한 현실에 처한 아이들의 육아를 도맡아 해온 정병호 교수(국문대∙문화인류).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정 교수는 대안교육 운동, 탈북 청소년 교육사업, 공동육아와 교육에 헌신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2014 올해의 교육인상’을 수상했다. 모든 아이의 아버지, 정병호 교수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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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걱정하다
20대,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도에 머물렀던 대학생 정병호. 그는 보길도에서 중학교를 다니지 않고 건너편 섬 노화도에서 하숙하며 공부하는 어부의 큰아들을 봤다. 보길도에는 좋은 선생님이 오지 않아 근방에서 명문으로 통하는 ‘노화중학교’에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교사가 되려면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을 거쳐야 했다. 남쪽 섬에는 ‘선생님’이 적었다. 그는 제도 교육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제도 밖의 ‘야학’을 통해서라도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울에 돌아온 그는 당시 신정동 철거민촌 한 귀퉁이 천막에서 야학에 동참했다. 그가 회상한 당시 현실은 우리들의 상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다 생계에 동원되고 대여섯 살 아이가 동생을 돌보는 상황이었습니다. ‘잔인한’ 산업화가 낳은 생활 환경은 비참했어요. 야학의 후원금을 모으러 간 자리에서 우연히 헤드스타트(Headstart) 운동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경주마가 뛸 때는 말머리를 나란히 놓아야 한다는 거죠. 가난한 가정 아이들은 취학 전에 이미 뒤처져 있어서 취학 전에 이들을 교육해야만 유복하게 자란 아이들과 비슷한 출발 선상에 설 수 있다는 겁니다. 이에 감명을 받아 계급 재생산의 고리를 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78년 그는 열악한 현실에 처한 아이들을 돕기 위해 ‘어린이 걱정 모임’을 만들었다. 대학교 4학년 때다. 이후 1980년, 가난한 집 아이들을 다른 아이들과 비슷한 출발점에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신림동 철거민촌 꼭대기에 ‘해송 유아원’을 개설했다. 당시 대통령의 영부인이 해송 유아원에 방문한 후 비슷한 모델로 새마을 유아원 사업을 시작했다. 법률상 시유지에 ‘무허가’로 지은 해송 유아원이 시립 새마을 유아원으로 수용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후 정 교수는 ‘해송 아기 둥지’, ‘탁아 제도와 미래의 어린이 양육을 걱정하는 모임’, ‘공동육아연구회’ 등을 거쳐 2001년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을 설립했다.
평범하게 그러나 특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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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호 교수는 1994년 ‘우리 어린이집’ 초대 원장을 맡는다. 아이들을 맡아 돌봐준다는 기본 틀을 유지하되 영리적, 관료적으로 운영됐던 기존 어린이집과 다르게 운영했다. 부모와 교사의 협동으로 창의적이고 자연생태적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 먼저 교사들 간에 위계질서를 타파하기 위해 서로 별명을 부르게 했다. 규범적이지 않은 관계를 통한 일상생활을 추구한 것이다. 또한 기존 어린이집은 주로 아이들을 한 장소에 하루 종일 머물게 하고 돌보는 형식이었지만 ‘우리 어린이집’은 ‘나들이 프로그램’을 실행하기도 했다. 나들이 프로그램은 최근 학생들이 누리는 ‘소풍’의 시초다.
‘우리 어린이집’ 이전의 유아 교육은 방 내부에만 아이들을 머물게 해 보호하는 방식이었다. 정 교수는 생기 없는 교육 현장에 변화를 주고자 시도했다. “아이들도 하나의 생명으로서 햇빛, 바람, 흙, 물 등 자연을 체험하면서 자라나게끔 지도하고 싶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모의 동참은 필수적이었으나 생소한 프로그램에 대한 의구심은 컸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저희는 육아로부터 부모들이 소외되지 않게끔 유도했습니다. 아이와 부모가 함께라면 아이는 사회화, 부모들은 재사회화의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이죠.” 우리 어린이집에서 추구한 부모와 아이가 함께하는 생활은 이내 마을 공동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젊은 부부들이 전입해 오기 시작하고 부모 간의 연계망도 촘촘해졌다. 이는 현재 서울시 ‘마을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인 ‘속리산 마을’의 모태가 됐다.
무인가, 무허가에서 이상을 실현하다
‘2014 올해의 교육인상’ 수상 소감에서 정병호 교수는 뜻밖에도 “미안하다”고 했다. 고등교육기관에서 정규직으로 대우를 받고 있는 ‘대학교수’에 비해 대부분의 영∙유아교육과 보육종사자는 열악한 근무조건과 임금격차를 겪고 있기 때문. “저는 공동육아 공동체교육 공동대표 입니다. ‘공동’이란 말을 세 번 반복할 만큼 늘 ‘함께’ 해 온 일로 ‘혼자’ 상을 받는다고 해서 쑥스럽고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함께 해온 모든 분들 그리고 아이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공동대표나 교수라서가 아니라 30년 간 해온 무인가, 무허가 교육현장 설립 의미를 인정받음에 감사하다고도 했다. “돌이켜 보면, 저에게 교육 현장은 제도를 넘어 이상을 실현하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즐거워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세대가 경험과 문화를 소통하는 장면을 경험하면서 ‘생명의 울림’을 느꼈습니다.”
부모에겐 동참을, 학생에겐 이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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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호 교수는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에 부모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아이들은 부모 세대의 대리 경쟁의 도구, 투자의 대상이 돼선 안됩니다. 입시 경쟁의 피해자가 되는 것을 막고 생명체로서의 아이를 느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공동육아는 소수자의 일로 국한돼 있습니다. 공동육아는 현재 사회인 탁류 속에서 ‘유기농 생수’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개천부터 정화해 나간다면 어느새 물길의 본류도 투명해질 것입니다. 아이들을 위한 부모님들의 자발적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한편 정 교수는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에 참여를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전했다.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을 위해 ‘함께 하는 일’의 가치에 대한 깨달음과 자기 자신 회복“이 우선이라는 것. 그는 20대를 낭만과 열정, 순수함을 잃고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했다. “1학년 때부터 취업, 자격증 관련 책을 접하고 방학 때마다 스펙을 위한 학원을 등록하는 것은 일종의 ‘중독’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중∙고등학교부터 심신, 정서, 사회성 부분을 좁은 길에서만 접했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이 부분들을 생략하고 억압했죠. 대학 4년이 ‘단 한 번뿐인 마지막 재활 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획일적인 청소년기를 벗어나길 바랍니다. 생명으로서 누릴만한 많은 것들을 이제부터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조급함을 경계하라’고 했다. “저는 20대에 뗏목을 타고 남한강을 떠다닌 적이 있습니다. 물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는 뗏목은 어렵사리 방향만 바꿀 수 있을 뿐 빠르게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학생들은 눈앞에 놓인 취업 문제에서 조금 벗어나 인생 전체를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지 고심해 보시길 바랍니다. 조직은 우리의 윤택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니까요. 할머니, 할아버지와 1시간, 2시간 온전히 대화를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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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및 약력
정병호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정치학사를 받고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에서 인류학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ERICA캠퍼스 국제문화대학 문화인류학과에 재직 중이고 글로벌다문화연구원 원장과 민족학연구센터 소장이다. 그리고 무지개청소년센터 소장, 국경없는 마을 이사, 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일본 고난(甲南)대학 일본학센터 소장,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사, 어린이 어깨동무 이사, 남북문화통합교육원과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최슬옹 학생기자 kjkj3468@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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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현 사진팀장 ssamstar@hanyang.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