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靑馬)’의 기운을 받아 아시아 정상으로!

‘청마(靑馬)’의 기운을 받아 아시아 정상을 노린다!
-한국 마장마술의 에이스 황영식 인터뷰

 

 

   
 

 

‘청마(靑馬)의 해’ 2014년. 여기에 어울리는 인물로 누구를 정할지 많은 고민을 했다. 고심 끝에 여기에 가장 부합한 인물을 찾아냈다. ‘말’의 해인 2014년에 ‘말’을 다루는 마장마술 종목에서 금메달 사냥에 나서는 90년생 ‘말’ 띠 황영식(생스 10)이 그 주인공이다. 누군지 잘 모르겠는가? 이래 봬도 그는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마장마술 개인전·단체전 금메달리스트다. 한국 마장마술의 에이스 황영식이 들려주는 말(馬) 이야기, 인생 이야기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둔 지난 1월, 사자후는 황영식을 만나기 위해 오산에 위치한 세마대 승마클럽으로 아침 일찍 발걸음을 옮겼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세마역에서 내려 차를 타고 10분 정도 들어가니 승마장을 찾을 수 있었다. ‘세마대 승마클럽’이라고 적힌 고풍스러운 현판이 반갑게 사자후를 맞이해주었다. ‘세마대(洗馬帶)’라는 명칭에는 말과 관련된 유래가 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산 위로 흰 말을 끌어다가 흰 쌀로 말을 씻기는 시늉을 보이자, 왜군이 성 안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착각해 퇴각했다는 이야기다. 승마장의 위치까지 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니, 말의 해인 2014년, 그의 운수가 제대로 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테다.


승마장에 도착했을 때 황영식 선수는 개인 훈련을 진행 중이었다. 실전과 거의 똑같은 훈련을 했기 때문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말을 능숙하게 다루는 그의 모습에선 늠름한 장군의 기상이 느껴졌다. 길들지 않은 야생의 말을 사람과 한 몸처럼 움직이게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까를 생각하니 경외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모래 위의 피겨’ 승마의 세계로 뛰어들다

30분이 지난 뒤, 훈련을 마친 황영식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승마 마장마술 금메달리스트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먼저 일반인에게 생소할 수 있는 승마를 소개했다. 그가 말하는 승마의 매력은 무엇일까?


쉽게 설명을 하자면 피겨 스케이팅 김연아 선수가 아이스링크에서 연기하듯이 마장마술은 말과 함께 모래판 위에서 펼치는 스케이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말을 자유자재로 부드럽고 아름답게 움직이는 모습을 심판에게 보여주는 종목이 바로 승마다. 또 살아있는 동물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서에도 좋다. 온 가족이 함께 즐기기에도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골프 같은 경우는 가족이 함께하는 스포츠라고는 생각을 안 하지 않나. 하지만 승마는 남녀노소 다 함께 즐길 수도 있는 스포츠다. 최근 들어 여가 문화가 발달하면서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거리를 찾는 추세다. 그런 흐름에 맞는 스포츠가 승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승마는 ‘모래 위의 피겨’라고 불린다. ‘피겨 여왕’ 김연아 덕분에 한국인이라면 웬만한 피겨 규칙은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승마 역시 피겨처럼 선수가 계획한 프로그램 자체를 평가하고 이를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따라서 채점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오로지 사람의 능력으로만 연기를 펼치는 피겨와 달리, 승마는 동물인 말과 함께 연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이 안 통하는 말과 함께 호흡을 맞추는 일이 쉽지는 않을 터. 하지만 황영식은 어릴 때부터 말과 친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여섯 살 때 부모님께서 망아지를 선물로 주셨다. 그걸 키우면서 자연스레 말과 쉽게 친해졌다. 부모님이 당시에 승마장을 운영하셨던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처음엔 취미로 말을 탔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지금은 돌아가신 전상교 코치님 밑에서 본격적으로 승마를 시작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게 되었다. (말과 어떻게 한몸이 돼서 연기를 펼치느냐는 질문에) 항상 비슷한 질문을 받는다. 나와 말 사이에 약속하는 게 있다. 이를 ‘부조’라고 하는데 정확한 약속에 맞춰 당근과 채찍을 잘 썼을 때 비로소 말과 한몸이 된 것처럼 연기할 수 있다.


사실 황영식과 인터뷰를 하기 전, 훈련장에서 독특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훈련장의 모든 벽면에 거울이 붙어있던 것. 그는 훈련 내내 시종일관 거울을 통해 자신과 말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는 듯했다.


거울을 통해서 말의 발걸음이나 자세를 보는 거다. 내겐 마틴이라는 독일인 트레이너가 있는데 지금 한국에 없다. 그분이 지금 나를 봐줄 수 없는 상황이라 나 스스로 거울을 통해 점검하고 있다. 말과 저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판단한다. 코치의 몫까지 혼자서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한국을 제패한 소년, 나홀로 독일 유학을 떠나다

말과 함께 성장한 황영식이 어려서부터 승마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건 당연했다. 그는 오산고에 재학 중이던 2008년 하계 전국승마대회에서 4관왕을 차지하며 한국 승마계를 깜짝 놀라게 했고, 마침내 국가대표에 뽑히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들떴을 법도 하지만 그는 일반 또래와 달랐다. 자만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냉철하게 파악했다.


그땐 국내 무대에서 잘했기 때문에 국가대표에 선발된 거였다. 하지만 당시에 신경을 하나도 안 썼던 이유가 내가 잘했다기보다는 (그 당시에) 잘하시는 분들이 한국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이 따른 덕분에 내가 국가대표가 된 것 같다. 태극 마크를 단 기쁨보다도 언젠가 그분들이 돌아오셨을 때 제대로 된 경쟁을 펼쳐서 이겨야 진정한 국가대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국가대표가 됐다는 것만으로 들떠서 자만해졌다면 나는 지금처럼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국내 무대를 휩쓴 황영식의 눈은 자연스레 승마의 원조, 유럽으로 향했다. 승마 강국 독일로 유학을 떠난 그는 직접 힘든 길을 택했다.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게 너무 싫어 제일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하겠다고 자처한 것. 승마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유럽에서 황영식은 선진 승마를 배우겠다는 신념 하나로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트레이너가 타는 말에 안장을 지우고 푸는 것은 물론, 말을 산책시키고 먹이를 주는 등의 일을 도맡은 것이다. 보통 이런 일은 선수가 전부 하지는 않지만, 황영식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여름엔 더위를 먹고, 겨울엔 동상에 걸리면서도 꿋꿋하게 버텨냈다.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처음에 들어갔을 땐 말을 하루에 한 마리만 타게 해주더라. 말 타는 시간보다 일하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트레이너에게 제대로 개인지도를 받은 것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였다. 근데 그러면서 오기가 생겼다. ‘내가 지금 일하러 온 건가, 말을 타러 온 건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포기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가 포기를 하고 한국에 돌아오면 부모님께서 앞에서는 ‘고생했다, 수고했다, 힘들었겠다.’라고 말씀하셨겠지만 뒤에선 얼마나 속상하고 힘들어하시겠나. 힘들어도 여기서 그만두면 부모님께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절대로 좌절할 수 없었다.


처음엔 견디기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황영식은 완벽하게 적응했다. 훈련장이 도시와 동떨어진 시골에 있었기 때문에 외적인 유혹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은 황영식 자신도 “복 받은 환경이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않던 트레이너도 황영식이 궂은일도 거리낌 없이 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이자 정성을 다해 지도해주기 시작했다. 가장 고생한 시기였지만 그는 가장 도움이 됐던 때였다고 말했다.


그래도 독일에 있으면서 가장 성장한 것 같다. 말 타는 실력이 좋아진 것은 둘째 치고,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생기다 보니 생각이 깊어졌다. 내가 왜 여기서 고생을 하고 있는지 생각을 해보고, 그렇다면 그다음엔 어떤 걸 준비해야 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성장한 게 아닐까. 게다가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의 변함없는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독일 생활을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약관(弱冠)의 나이로 아시아 정상에 우뚝 서다

독일 유학을 성공적으로 마친 황영식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대표로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대회 직전 그의 말이 봉와직염(蜂窩織炎; 피부에 세균이 침범하여 생기는 염증 반응)에 걸리면서 비상이 걸렸다. 파상풍과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면서 다리가 심하게 부어 대회 출전 여부가 불투명해진 것. 중국에 입국하기 열흘 전까지도 말을 타지 못했던 상황이라 다른 말로 대체하려는 생각도 들었지만, 황영식은 중국에 간 이후로 지극정성으로 말을 돌보았다. 하늘도 그의 마음을 알아봤던 것일까. 병의 증상이 완화되면서 황영식은 자신이 아끼는 말과 함께 아시안게임에 무사히 나갈 수 있었다. 아시안게임이라는 큰 무대에 데뷔하게 된 그에게 두려움과 기대감이 공존했다.


실제 대회에 나설 때는 처음에 정말 떨렸다. 나만 아시안게임 경험이 없었으니까. 선수들끼리의 기 싸움도 생각했던 것보다 심했고. 그래도 말을 타기 전에 있던 두려움이 말을 타니까 감쪽같이 사라지더라. 말과 함께 연기를 펼칠 땐 무서울 게 없었다. 단지 내 플레이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내가 여태까지 고생했던 것, 그리고 독일에서 2년 반 동안 연습했던 것을 떠올리며 평소에 하던 대로 보여주자고 마음을 먹었다. 내 목표는 언제나 금메달이다. 금메달을 바라보고 가는 게 스포츠인의 기본적인 사상이기도 하고. 하지만 금을 딸 수 있을 거라고 확신을 했던 건 아니다. 다만 후회하지 않는 연기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황영식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며 2관왕을 달성했다. 한국 승마가 아시안게임에서 4개 대회 연속 메달을 획득한 역사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이룬 것이다. 금메달을 따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먼저 열린 단체전에선 홈팀 중국과 금메달을 놓고 경쟁했다. 지난 소치 올림픽에서 석연치 않은 편파판정으로 금메달을 놓친 김연아의 사례를 보더라도 홈 어드밴티지는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피겨처럼 심판의 점수로 메달이 결정되는 승마에서 한국은 홈팀 중국과 비교하면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황영식이 속한 한국 대표팀은 당당히 금메달을 따냈다.


솔직히 지금에 와서야 “그럴 수도 있었네.”라는 생각이 들지,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홈 이점이 있다는 얘기는 대표팀 형들을 통해서 들었을 뿐이지, 나는 그런 걸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딱히 중국이 점수를 더 받는 것 같지도 않았고. 내 스타일이 원래 다른 사람들의 결과에 대해서도 무덤덤한 편이다. ‘누가 잘했다. 누구는 못했다더라.’ 이런 얘기는 집중에 방해만 될 뿐이다. 어차피 나만 잘하면 좋은 점수가 나오는 거니까 그런 외부적인 요인은 더더욱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중국도 잘했으니까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고 본다. 못했는데 2등을 차지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 우리가 금메달을 땄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그저 행복했다.


황영식은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기세를 개인전으로 이어갔다. 개인전 금메달 경쟁상대는 말레이시아의 쿠잔드리아 누르 마함마드와 마함마드 페티 캐블리였다. 금메달을 낙관하기는 힘들었지만, 황영식은 전력의 열세를 뒤집고 2관왕의 위업을 이뤄냈다.


사실 나랑 그쪽(말레이시아 대표)이랑 게임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두 선수 모두 왕족이었고, 말도 저보다 스무 배 정도 비싼 말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가 그들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건 그분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노력하고 땀을 더 흘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내가 그만큼 더 노력했기 때문에 어려운 상대와의 경쟁에서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자신과의 싸움’ 인천 AG에서 영광 재현할 것

그렇게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2관왕을 달성했고, 어느덧 4년이란 시간이 흘러 그는 다시 한 번 아시안게임 무대에 도전한다. 게다가 올해는 인천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리기 때문에 욕심이 더욱 들만도 하다. 인천 아시안게임 각오를 물어보았더니, 그의 대답에서 디펜딩 챔피언의 면모가 느껴졌다.


당연히 금메달이다. 이번에도 2관왕 하는 게 목표고. 물론 생각만 한다고 목표를 이룰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을 한 만큼 노력하고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 상을 딴다는 자신감이라기보다는 누구보다 노력을 많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내가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족한 재능을 노력으로 극복해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서는 것이 나의 목표다.

   
 

◆은퇴 후 후진 양성에 힘 쏟고 싶어...승마의 매력 직접 느껴보기를

인터뷰를 마치면서 황영식에게 조금은 거창한 질문이지만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건넸다.


한국 승마가 정말 발전됐으면 좋겠다. 내가 승마 선수생활을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후배를 양성하는 일을 굉장히 좋아한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후배들이 성공한다는 사실 자체가 보람차기 때문이다. 나는 외국으로 가서 지도를 받고 왔지만 그렇지 못한 친구들에게 내가 배워온 걸 열심히 가르쳐 주면 똑같아지지 않겠나. 그렇게 해서 모든 어린 친구들이 열심히 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한국 승마가 승마 선진국의 수준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승마계에 있으면서 최선을 다해 후배들이 할 수 있는 의지를 불어넣는 일이죠.


황영식은 한국 승마계의 발전을 위해서 후진 양성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일반 사람에게도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단다.


승마는 행복하고 순수한 운동이다. 승마를 통해 사람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다. 그런 걸 다 잊고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동물과 운동할 수 있는 좋은 스포츠다. 꼭 승마장에 오셔야만 승마를 즐길 수 있는 건 아니고, 제주도에 가서 말 한 번 타시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승마의 매력을 직접 느껴보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지막으로 황영식은 한양대 학우들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전 한양인이라는 것에 굉장히 자부심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김동완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제가 여기까지 대학생활을 잘 마치고 순탄하게 올 수 있게 도와주신 분입니다. 또 한양대 재학 시절 금메달을 땄기 때문에 한양대라는 울타리가 저에겐 굉장히 뜻깊게 다가옵니다. 지금은 비록 졸업해서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났지만 언제나 한양대 출신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제가 학우 분들께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게 있다면 운동을 하시든 공부를 하시든 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품고 하셨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들어온 학교고, 학교에 있을 때 내가 가장 열심히 했던 시절이 있다면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그러한 자세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에서 느낀 점이 있다면 그는 정말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시아 No.1의 자부심이 있을 법도 하지만 그는 자신을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말을 아끼는 마음도 남달랐다. 예쁜 여자보다도 자신이 아끼는 말에게 더 큰 매력을 느낀다고 할 정도다. 황영식의 말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20세의 어린 나이로 광저우 아시안게임 2관왕을 달성하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의 도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올 9월에 열리는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도 ‘청마’의 기운을 그대로 이어받아 다시 한 번 아시아 최정상에 우뚝 설 수 있기를 사자후가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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