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인정한 난타, 브로드웨이 장기공연 문제 없다"
'Good Vibes!(기분 좋은 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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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언론 뉴욕타임즈는 난타를 이렇게 평가했다. 1997년 국내공연을 시작한지 6년만의 쾌거다. 난타는 역사상 아시아 작품으로는 두 번째, 우리 작품으로는 첫 번째로 뮤지컬의 본고장 브로드웨이 무대를 밟았다. 우리의 작품이 통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도 잠시, 난타의 '기분 좋은 떨림'에 파란 눈의 관객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이 성공을 발판으로 이제 난타는 브로드웨이에서 전용관을 준비하며, 장기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아무도 가지 못했기에 격이 다른 무대로만 여겨졌던 브로드웨이, 그곳에서 우리가 먼저 울고 웃었던 난타가 '쿠킨(Cookin)'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뮤지컬 작품으로 공연 전문기업으로 성장한 PMC 프로덕션, 그 중심에 대표이사이자 경영전문가인 이광호 동문(섬유 82년졸)이 있다.
난타, 문화산업의 새 지평 열다
물론 난타가 처음부터 성공가도를 달려온 것은 아니다. 외국 배급통로가 전무했던 당시, 난타를 브로드웨이 무대에 세우겠다는 신념 하나만을 가지고 송승환 공동대표는 대형 프로모션에 맨몸으로 부딪혀 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공연 비디오 테이프 하나만을 가지고 찾아온 그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난관에 부딪히고 보니, 저희들은 거꾸로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세계적인 공연을 우리나라에 누가 팔았냐는 것이죠. 찾아보니 브로드웨이 아시아의 시몬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우리의 공연을 보여주었고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준비가 모자랐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브로드웨이 공연을 위한 여러가지 절차를 요구했고 브로드웨이에서의 성공은 그 과정에 맞춰 준비해 온 결과라고 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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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웨이 아시아가 요구한 것은 세계적인 뮤지컬이 모이는 에딘버러 페스티발에 참가하는 것. 난타는 99년 페스티발에서 좋은 평가를 받음으로써 하나의 공연에서 종합적인 문화상품으로 거듭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이광호 대표의 진가는 발휘되기 시작했다. 이 동문의 첫 번째 시도는 국내 최초 전용관 건립과 난타를 외국인에게 알리는 것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그 첫 번째 타겟은 당시 외국 관광객의 60퍼센트 이상을 점유했던 일본인이었다.
"전용관을 지으면서 제일 먼저 고려한 것은 한국에 가면 난타라는 공연이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일본에서 3년 동안 투어 공연을 했고 TV광고, 여행사 패키지 등 동원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처음 전용관을 만들고 직원들에게 외국인 한 명 당, 천 원씩 인센티브를 약속했는데, 얼마 후에는 직원들의 수입이 월급보다 인센티브가 많아졌습니다(웃음). 전용관 관객의 외국인 점유율이 50퍼센트만 넘으면 장기공연을 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는데, 첫 해에 50퍼센트, 두 번째 해에는 80퍼센트 수준까지 점유율이 올랐습니다."
문화산업의 최대 경쟁력 '재미'
난타의 브로드웨이 진출의 의미는 크다. 지금까지 아시아의 어떤 공연도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하지 못한 현실에서 난타에 대한 호평과 장기공연을 위한 전용관 건립 추진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 과연 다른 공연들과 차별화된 무엇이 난타의 성공요인일까. 이광호 동문은 그러한 질문이 우문이라고 한다. 전 세계인에게 통용될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상업성 즉 흥행성입니다. 브로드웨이라는 곳은 전 세계에서 가장 상업적인 지역입니다. 평을 받을 때 예술성이 너무 없으면 나쁜 평을 받을 수 있지만, 흥행성 또한 큰 평가기준입니다. 브로드웨이에선 손님이 들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초기비용이 들었다고 해도 1주일만에 공연을 내려버립니다. 잘 되는 작품은 손익분기점으로 떨어질 때까지 공연을 계속하죠. 10년이든 20년이든 말입니다. 그것이 브로드웨이의 생리입니다. 어느 나라 사람들이든지 뉴욕에 가서 보고 재미있을 수 있느냐가 브로드웨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냐의 가장 중요한 판단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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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호 동문은 PMC 프로덕션 공동대표에 취임하기 전까지 충남방적 전무이사라는 직함만을 가지고 있었다.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섬유산업에 종사하는 정석의 코스를 밟아왔던 것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문화산업에 뛰어들어 어느덧 정상에 서 있다. 하지만 그는 문화산업과 일반기업이 생각만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에 대한 명확한 구분에서 비롯된다.
"순수예술은 정부의 재원이나 각종기관에서 지원 육성을 해줘야 합니다. 그것이 바탕이 되었을 때 상업예술이 꽃을 피울 수 있죠. 하지만 우리 회사의 경우 철저한 상업예술입니다. 즉 흥행을 전제로 한 공연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저는 공연을 가지고 기업화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다면 유지발전이 제1의 목표입니다. 문화산업이 제조업체의 경영만 가지고 가능한 분야는 아니지만 철저하게 경영적인 것을 가미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2의 난타를 찾아라
이광호 대표가 요즘 노력하고 있는 것은 난타의 해외 공연과 함께, 제2의 난타 찾기. 그의 문화산업 지론인 지속적인 이익창출을 위해서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 회사명을 공연(Performance), 음악(Music), 영화(Cinema)의 첫 철자로 따온 것도 포괄적인 문화산업을 진행해 보겠다는 그의 욕심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제 문화산업과 함께 난타라는 브랜드 가치를 이용한 의류·외식 산업까지 확장을 꿈꾸는 그의 표정은 진지하다.
"제2의 난타를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 진행중이죠. UFO와 같이 다른 공연작품도 상품화를 위해 노력 중이지만, 영화나 음악산업과 같은 보다 대중적인 분야로의 진출도 준비중에 있습니다. 이와 함께 비록 우리 작품이 아니더라도 외국에 소개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이 있다면 우리가 가진 노하우를 통해 교량 역할을 해 볼 의향도 가지고 있죠. 너무 광범위하다고도 볼 수 있지만 모두 연관된 분야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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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학 이후 PMC 대표이사직을 맡기 전까지 섬유산업과 20여 년을 함께 해온 이광호 동문. 전공과 다른 분야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덕담을 부탁한다는 말에 처음부터 전혀 다른 길을 찾는 것은 좋은 모습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그 전공을 선택했냐는 것이다. 이 동문은 현재 자신이 공부한 분야에서 먼저 최고가 되라고 충고한다.
"저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찾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봅니다. 4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배운 것을 통해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것이죠. 저의 경우나 주위사람들의 경우를 봐도 그 후 인생에서 몇 번의 다른 분야로 나아갈 기회는 찾아옵니다. 그 때는 어느 쪽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새로운 분야를 시작한다는 것은 안전한 길을 갈 때와는 또 다른 성취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프로덕션을 경영하며 느끼는 가장 큰 보람이 전체 수입의 90퍼센트 이상이 외화 수입이라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 동문. 그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속적인 사업 확장과 함께 언젠가는 돌아가고 싶은 강단이 있기 때문이다. 겸임교수를 그만 둔 이유를 묻는 말에 제자들에게 경영학을 가리키기에 경영자로서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고 말하는 이광호 동문. 본인 스스로 성공한 경영자라는 판단이 들었을 때 강단에 돌아갈 것이라는 그의 고백이 북소리만큼 경쾌하게 들린다.
학력 및 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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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김태호 학생기자 magicguy@ihanyang.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