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변화 사이 길을 묻다

국악, 문화재가 아니라 문화다

 

한국적 뿌리를 가진 음악, 국악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음악을 국악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국악의 정의는 ‘지역’이 아니라 그 ‘본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음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듣는 알람, 낮에 거리를 걷다 들리는 대중가요부터 스마트폰으로 듣는 노래까지. 하지만 그 무수히 많은 노래 중에 국악이 얼마나 될까.

 

일제강점기, 국악 내리막길을 걷다


국악은 본디 대중의 음악이다. 몇 십 년 전만해도 장에서 국악인이 천막을 치고 판소리 한 소절을 뽑는 것은 흔한 풍경이었다.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던 국악은 굿이었다. 마을에선 정월초하루 마을 안녕을 비는 대동 굿을 했다. 무당의 굿판에서는 우리의 소리와 춤, 악이 어우러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는 대동 굿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경계했다. 항일 운동으로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무당의 굿판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고, 굿에 들어있는 우리 민족의 기층문화를 미신으로 날조해 열등감까지 심었다. 결국 우리 음악의 공연장이던 굿은 미신이 됐고, 국악은 천한 음악으로 왜곡 변질됐다. 일제는 뒤이어 1909년 원각사(1908년 건설된 창극 공연장)를 폐지하고 우리 음악이 공연되지 못하도록 막았다. 학교에서도 일본 음악과 서양 음악을 가르칠 뿐 국악을 싣지 못하도록 했고, 국악은 점점 대중으로부터 격리됐다.

 

   


해방 이후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을 따라가느라 여전히 국악을 돌 볼 여유가 없었다. 많은 예능인이 사장됐다. 해방 이후 한동안 국악이 다시 비상하려 했으나 결국 대중에게 다가가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다. 뮤지컬 ‘캣츠’를 보는 것은 별로 특이할 것 없는 일이지만, ‘수궁가’나 ‘심청전’을 보러 간다고 하면 의아해 하는 세상. 국악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올 방법은 없을까. 현역을 은퇴해 고등학교에서 후학 양성에 매진하는 왕기철 동문(국악.81), 현재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에서 예술 감독을 맡고 있는 류형선 동문(작곡.83), 그리고 국악의 미래를 짊어질 국악과 학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국악의 과거, 마지막 불꽃의 시대

 

   

해방 이후 자유롭게 우리 음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자 웅크리고 있던 국악인들은 활발히 작품 활동을 펼쳤다. 왕기철 동문은 그 시대의 국악인들에게 사사한 판소리 명창이다. 국립창극단에서 15년동안 판소리 주연을 도맡던 그는 지난 해 9월 모교인 국립전통예술고로 돌아가 교편을 잡았다. 국악계를 짊어질 후학을 양성하겠다는 부푼 꿈에서다. 중학교를 갓 졸업한왕 동문은 먼저 국악인의 길을 걷던 셋째 형 왕기창 씨의 권유로 서울에 올라와 가야금 병창에서 인간문화재 23호로 등록된 박귀희 명창의 제자로 들어갔다.

 

왕 동문은 국악인이 지금의 아이돌 못지 않은 대접을 받던 때를 기억한다. 왕 동문의 은사인 박귀희 명창은 남자 역할로 창을 할 때 공연이 끝나고 혈서로 쓰인 연서도 여러 통 받았다. 박귀희 명창이 남자인줄 알고 결혼해달라는 여성 팬도 수두룩했다. 왕 동문 역시 공연마다 관람하는 팬이 여럿이었다. “국악인들이 천막을 치고 거리에서 공연을 하고, 공연이 끝나면 푸대자루에 돈을 쓸어담던 시절도 있었죠. 그만큼 예술인과 관객이 가까웠어요.”

 

80년대 초반에는 전통예술인들이 스타 같은 대우를 받았다. 병신춤의 공옥진 씨, 판소리의 조상현 씨, 박동진 씨, 민속춤의 김숙자 씨 같은 전통예술인들은 TV 프로그램에도 자주 나오는 단골인사였다. 공옥진 씨는 지난 82년, 1년 동안에만 전국 33개 대학에서 초청을 받아 공연을 할 정도였다. 86년에 MBCTV에서 상영한 ‘우리 춤 우리 가락’이라는 프로그램은 가야금 병창, 판소리, 고전 무용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프로그램 전후로 광고가 3개씩 붙었다.

 

우리대학은지난 81년부터 시대의 흐름에 부응해 판소리 전공을 선발하기 시작했고, 여러 명창에게사사한 왕 동문은 반액장학금을 받으며 우리대학에 입학했다. 작고한 판소리 인간문화재 5호 정권진 명창, 한농선 명창, 김경수 명창 등을 거치며 왕 동문의 소리는 점점 농익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모교인 전통예술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왕 동문은 무대가 그리워 안정적인 학교를 그만두고 국립창극단에 입사했다. “99년 1월1일부터 국립창극단에서 작년 8월까지 15년 동안 몸 담았습니다.” 국립창극단에서 왕 동문의 커리어는 화려했다. 주연을 30회 이상 하고, 99년 입사와 동시에 심청전 완판 창극에 심봉사로 캐스팅 됐다. 뒤이어 수궁가에 별주부역, 흥부전에 흥부역을 맡았다.

 

왕 동문은 국악의 매력을 ‘어머니 같다’고 표현했다. “국악은 따뜻한 매력이 있습니다. 국악을 통해 에너지를 받고, 행복을 알게 됐어요. 국악은 제 인생을 바꿔준 일생일대의 기회이기도 했으며, 저를 만들어준 어머니 같은 존재기도 하죠.”

 

국악의 현재, 국악의 재도약을 꿈꾸다


작곡과를 졸업하고 프리랜서 작곡가로 활동하던 류형선 동문(작곡.83)은 차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라디오에서 듣게 된 춘향가로 국악을 전공할 마음을 먹었다. 춘향아씨가 옥중에 갇힌 소식을 전하러 한양으로 올라가는 방자와, 어사또가 되어 거지행색으로 남원으로 내려가는 이도령이 상봉하는 대목이었다. “차를 세우고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듣다가 더는 국악 공부를 미룰 수 없다고 마음먹고 이듬해 한국예술대학교 전통예술문화원 전문사 과정에 입학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국악 공부로 류 동문은 올해 4월 국립국악원 창작극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했다.

 

   


류 동문은 국악이 ‘이 땅의 오래된 음악’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애착을 갖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국악은 장단의 원리나 선율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시김새, 다양한 길바꿈만으로도 흥미와 관심을 갖기에 충분한 흡인력이 있어요.”

 

류 동문은 과거와 달리 국악에 대한 대중의 선호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더 많은 사람의 가슴에 와닿는 국악이 되는 것이 류 동문을 비롯한 창작악단 모두의 고민이다. 창작악단은 전통을 연주한다. “국악이 오래전부터 내려온 이 땅의 음악이듯이, 오늘날 만들고 연주하는 국악이 미래에 기억될 만한 전통음악이 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류 동문은 창작악단의 활동을 통해 국악을 한층 더 넓고 깊게 확장하겠다는 포부를 다졌다.

 

창작악단은 올해로 창단 10주년을 맞이했다. 올해 9월과 10월에 ‘이면을 빚다’라는 주제로 알찬 음악축제를 준비 중이다. 류 동문은 창작악단 단원들이 작곡하고 편곡한 작품들로 무대를 꾸미는 실내악 무대와 새롭게 작곡 또는 개작된 작품들로 준비되는 관현악 콘서트, 학술대회, 음반까지 총 네 개의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한편, 올해 6월에 개최된 온나라 국립국악경연대회에서 우리대학 국악과 학생들은 매우 우수한 성적을 냈다. 고영열(음대·국악 3) 씨는 춘향가 중 이몽룡과 장모의 상봉 대목을 불러 판소리 부문 금상을 받았다. 김보나(음대·국악 3) 씨는 작곡부문에서 금상을 받았다. 이예지(음대·국악 2) 씨는 국립극단 연수원 출신 참가자를 제치고 정가 부문에서 은상을 탔다.

 

‘국악이 왜 대중과 멀어지게 됐을까’하는 물음에 세 사람의 답은 각자 미묘하게 달랐다. 고 씨는 시대가 바뀌면서 대중의 선호도가 변한 것이 문제라고 짚었다. “시대가 변하고 80년대에 통기타도 들어오고 포크송도 유행하면서 대중음악이 더 귀에 익고 세련돼 보이기 시작한 것이 원인 같아요. 70년대나 80년대만해도 판소리 명창들이 TV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국악기를 다루는 분들도 예능에 종종 출현했죠. 요즘은 대중음악에 대한 대중의 선호가 워낙 강해서 그쪽으로 관심이 쏠리는 것 같아요.”

 

김 씨는 국악의 진입장벽이 높은 것이 문제라고 했다. “국악은 어려워요. 전통음악의 깊이는 젊은 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없도록 만들죠. 그렇다고 귀에 친숙한 대중적인 선율을 연주하면 한국적 전통을 잃게 돼버려요. 국악인들은 누구나 한국적인 음악을 할 것이냐 대중적인 노선을 걸을 것이냐 하는 기로에 부딪친다고 봐요. 국악의 방향성을 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씨는 국악에 대한 무관심이 대물림 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국악과 전통을 강조하는 것은 얼핏 남들은 다 엑셀을 밟고 달려갈 때 우리만 브레이크를 밟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줘요. 어린 자녀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부모는 많아도 가야금이나 퉁소를 가르치는 부모님은 없잖아요. 국악기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이 학교 가서 단소를 다루기 어렵다고 싫어하게 되고, 그렇게 국악에 대해 관심이 없는 아이들이 자라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문제에요.”

 

국악의 미래, 변화와 상생을 그리다

 

   


류 동문은 현재 국악계가 대중화를 위한 돌파구로 지나치게 ‘기획적 측면’에 집착하는 것 같다고 우려를 표했다. “소문이 많이 나거나 획기적인 콘셉트로 기획을 잘하면 대중들이 알아줄 것이라는 기대는 착각에 불과합니다. 대중은 아주 영민하죠.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기획에 두 번 다시 티켓값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그런 실수를 ‘국악대중화’라는 슬로건을 내 걸고 너무 많이 반복하고 있어서 참 안타까워요.”

 

류 동문은 ‘밀도 있는’ 국악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뿌리가 튼튼하다면 줄기를 세우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줄기가 튼튼하면 곁가지는 저절로 생겨나는 법이죠. 화려한 곁가지를 먼저 만들어서 사람들의 주목만 끌려고하면 안돼요. 국악 대중화는 경쟁력 있는 음악 콘텐츠를 생산하는데 주력해야 하고, 경쟁력 있는 국악 콘텐츠는 ‘음악적 밀도’가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고 씨 역시 주변의 인식보다도 국악 스스로가 먼저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대에 따라 음악은 쭉 변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해왔던 국악보다는 대중의 입맛에 맞는 국악이 더 나왔으면 좋겠어요. 이건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등에서 전통음악 전공자들의 공통적인 고민입니다. 물론 오리지널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어야겠죠. 문화재가 없어지면 음악도 없어지니까요. 다만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을 잃지 않는 선에서 창조적인 변용을 더 많이 시도했으면 좋겠어요.”

 

김 씨는 국악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어렸을 때부터 국악을 접하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단소는 초심자가 소리내기 어려워요. 하지만 공부는 어려워도 해내려고 시간을 많이 투자하잖아요. 국악기로 그렇게 시간을 들여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서양음악이 우리에게 익숙해진 이유가 TV 프로그램에서도 많이 접할 수 있고 OST로도 많이 쓰이기 때문이잖아요. 국악도 서양음악처럼 미디어 노출도를 높여야 해요.”.

 

   

이 씨는 공연문화 활성화와 국악인에 대한 지원 확대를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공연하기 위해선 돈이 많이 필요해요. 우리나라에서도 국악을 하는 사람들이 적다고 투자를 아끼지 말고 투자를 많이 해줬으면 해요. 사실 대학에 있는 음악대학 소속 학과들을 보면, 서양음악은 ‘서양음악학과’로 통합돼있지 않고 작곡과, 관현악과, 성악과 이렇게 세부적으로 나뉘어서 교육을 받는데 국악 같은 경우는 대체로 ‘국악과’ 한 학과만 있어요. 국악도 분류가 많은데 모든 국악전공 학생들이 국악과로 들어가서 세부전공이 나뉘게 되죠. 판소리 전공 같은 경우 한 학년에 2명밖에 안돼요. 국악인재 육성을 확충하고 지원을 늘려야 국악 진흥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왕 동문은 전통극과 더불어 창작극이 늘어야 한다고 말했다. 왕 동문은 천주교 미사를 판소리로 만들기도 했다. 20대 백수의 삶을 판소리로 만들어 공연한 적도 있다. “인류문화유산에서 판소리가 호평을 받고 있어요. 국악계 스스로도 대중화를 위한 노력을 아끼면 안됩니다. 세계의 좋은 뮤지컬을 우리나라에서 공연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도 우리의 창극을 외국으로 가지고 나가야 해요. 독일에서 수궁가, 심청가 공연을 했는데 매우 성공적이었어요.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더군요. 신비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우리 판소리도 얼마든지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국악계와 대중이 그것을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국악을 더 알기 위해서는 우선 국악을 접해야 하지 않을까. 국립극장은 7월 4일부터 7월 26일까지 ‘여기 우리 음악이 있다’를 주제로 ‘여우락’ 공연을 진행한다. 한양대학교 총학생회와 협력하여 우리대학 학생들은 반값인 1만5000원으로 공연을 볼 수 있다. 무더운 방학 우리 음악을 들으며 국악이 박물관 속 문화재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우리의 문화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껴보는 것이 어떨까.

 

 


김선희 학생기자 pdg10@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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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요진 사진기자 loadingman@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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