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박 100 : 국문학과 이승훈 교수

집착을 버리는 삶 강조하는 '만년청춘' 국문과 이승훈 교수

"선(禪)의 말씀을 따라 가다보면..."

 

 실수로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연구실에 도착했다. 아직 잠겨있는 문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을 수만은 없어 다시 내려가는데, 밑에서 이승훈 교수가 올라온다. 선약을 잡아놓은 취재기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사뿐사뿐 계단을 올라오는 노교수의 여유로움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우려돼서다. 검은 구두, 검은 바지, 검은 뿔테 안경에 도저히 60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검은 머리칼까지, 이 교수의 아침은 여유로우면서도 방직해보였다.

 

영월 하면 돌아가신 이경선 선생님 생각난다 선생/님은 나의 은사이시다 우리 국문과엔 선생님에 대해/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1970년대 어느 해

- 영월 생각 중 발췌

 

 그에게 이번 여름은 한양가족으로서 33번째 맞는 여름이다. 33년 전 학생 신분으로 찾았던 교정은 이제 그의 제자들이 채워나가고 있다. 같은 과 이도흠, 정민, 조성문 교수는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기도 하다. 그토록 오랜 기간 학교가 변하는 모습을 봐 온 그는 그런 변화가 반갑다고 말한다. 그 정도 변화는 여유 있게 받아넘길 수 있다는 뜻일까? 계단에서 들었던 그의 여유로운 콧노래가 자꾸 생각나는 것은 그 때문인 모양이다.

 

“공돌이가 글쟁이로 둔갑한 이유는?”

 

   
 

 1942년 춘천에서 출생한 이 교수는 61년 본교 섬유공학과에 입학했다. 이른바 ‘공돌이’였던 그가 시에 취해 국문과로 전과한 것은 이미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후인 3학년 때다. 당시 국문과 교수였던 박목월 선생의 추천으로 “낮” 등 두 편의 시가 잡지에 실렸다. 이 교수를 말할 때 자연스럽게 따라 오는 것이 ‘시인 이승훈’ 이듯이 그의 학문적 활동이나 성과를 말할 때도 그의 시 세계를 빼놓고는 온전한 그를 담아내기 어렵다. 그렇다면 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공돌이’가 ‘글쟁이’로 둔갑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 교수는 이에 대해 그저 인연일 뿐이라고만 설명했다. 복잡한 인과관계 따위는 없다는 덧붙임과 함께.

 

 “불교를 만난 것도 인연이었죠. 4~5년 전에 하동 근처 칠성각이라는 곳에서 장모님 49재를 지낼 때 금강경독본을 받았어요. 짬 내서 읽는데 이거다 싶더군요.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나라는 생각인 아상, 사람이라는 생각인 인상, 중생이라는 생각(중생상), 오래 산다는 생각(수자상)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었어요. (한마디로) 나 자신을 버리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에게 불교는 새로운 문학 지평을 열어준 계기이자 통로다. 박찬일 시인은 이 교수 시의 중심이 주체 분열에서 주체 부정으로 변모했으며 선(禪)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시의 중심이 큰 폭으로 바뀌었는데도 고민한 번 없었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이 교수는 가벼운 미소로 응대할 뿐이다. “그게 팔자고 인연이죠”라고 말이다.

 

 불교와 만나기 전 시기의 대표적인 시 중 하나인 ‘당신의 방’ 또한 주체 분열을 노래하는 시다. 그는 그 시에서 천개로 분리된 자아를 노래하며 ‘또 하나의 자신’인 ‘당신’에게 가려고 했다. 그러나 당신의 방은 “천 개의 의자와/천 개의 들판과/천 개의 벼락과 기쁨과/천 개의 태양이 있”는 방이었고, 당신은 무수하게 분열되어 있는 그 자신이었다.

 

 “제 시의 주제는 자아 찾기에요. (시 쓰기의) 중기단계였던 80~90년대에는 후기 구조주의자들을 통해 주체를 그렸지요. (그러다 문득) 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들이 밉고 우울한 상태가 지속됐죠. (그 이후에) 시집 ‘번우’와 ‘인생’에서는 불교 사상을 도입했어요. 나를 버리려는 노력이 시에서 드러나게 됐죠.”

 

“집착을 버려라”

 

 이 교수가 말하는 인연이란 자기중심 사고를 버리고 평등한 관계에서 맺는 인연이다. 그는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는 오만함이 자연을 착취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나무 중심으로도 염소 중심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데, 인간만이 중심이 되는 것은 이기적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죽은 후 자신의 몸을 매의 먹이로 주게 하는 티벳의 풍습이나, 물에 던져 물고기 밥으로 되게끔 하는 것도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선생님이 있어서 학생이 있는 거예요. 계몽주의가 신뢰했던 인간 이성은 교활해졌어요. (아상을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내가 없다면 반인간 평등주의로 생태계를 살릴 수가 있어요. 인간 중심으로 해서 이 꼴이 났어요. 21세기 세계관은 불교가 돼야 해요. 저는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하나의 세계관으로 불교관을 (가치 있게) 보는 겁니다.”

 

 나도 언어 당신도 언어 그도 언어 연필도 필통도 인/삼도 인삼도 학생들이 선물한 캡슐도 동서가 생/일 기념으로 선물한 인삼 뿌리도 언어다 선생도 언어/여기도 언어 저기도 언어 단언하건대 이 단언도 언어/요구하고 명령하고 약속한다 나는 요구한 적이 없지만/언어가 요구하고 명령하고 언어가 약속한다 믿든 말든/이 언어에 경의를 표하고 축하하고 감사하고언어 축/복 언어 저주 유죄도 언어 무죄도 언어 개구리 개구리/춘천교대 교수 시절 초여름 밤 석사동 논에서 울던 개/구리 소리도 언어다 나는 이 언어들을 버리려고 이제/까지 시를 썼다 아아 힘이 든다

- 언어를 버리려고

 

 그가 집착을 버린 것은 비단 인간 중심의 사고 뿐 만이 아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일련의 해체시를 통해 자아는 없다는 생각을 보여줘 온 이 교수는 선(禪)을 통해 최종적인 답을 찾았다. 그는 진정한 선불교는 표현수단으로 언어를 쓰지 않는, 언어에 대한 집착을 버린 전위예술이라고 말한다. 그가 최근 내놓았거나 현재 진행 중인 연구논문도 ‘선과 존 케이지’. ‘선과 백남준’ 등 대부분 이와 관련된 것들이다. ‘푸코의 주체 개념’, ‘탈근대 주체 이론’ 등 지난 2년 동안만 15여 편에 다다르는 논문이나 저서들을 쏟아낸 그의 수많은 연구 결과들은 학자 이승훈이 학문에 대한 집착만은 버리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 교수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결과적으로 그의 시에 생명을 불어넣게 됐다. 시 이론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새로운 시 형태 개발을 위한 시도는 지속적인 시작(詩作)을 위한 힘이었다. 96년 시의 미적 가능성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을 때 해체주의를 옹호하며 정신주의 진영의 비판을 반박했던 대표적 학자도 바로 이 교수였다. 그의 그런 학문적 토대 덕분에 현대시 동인들의 몰락 속에서도 이 교수는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젊은 독자들은 <현대시> 동인들의 시를 읽지 못했고 현대시 동인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풍문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말년의 이 총체적인 몰락에서 다만 자신의 시론과 시작의 힘으로 간신히 살아남은 것이 이승훈이었다.

- 이화여대 국문과 이인화 교수

 

 그런 그이기에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변하는 것들에 대해 호의적이다. 그는 세대의 몫이 있다는 말로 자세한 설명을 대신한다. 모든 것은 변해야 한다는 것이 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교정에서 함께해온 노 교수의 생각이다. “요즘 학생들은 발랄하고 투명하더군요. 스스로를 잘 드러내는 것이지요. (수업 시간에) 자기 생각 발표하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재미있게 살아가는 거지요. 학교는 사회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곳이니까요.”

 

언제나 젊은 시인

 

   
 

 영월 하면 더오르는 게 많다 2003년 5월 한양대 국/문과 답사 여행 답사 지역은 강원도 영월 참여 교수는/정민, 서경석, 이도흠, 조성문 모두 젋은 교수들이고/나만 갑자기 원로(?) 교수가 되어 떠났다 정민, 이도/흠, 조성문 교수는 학부 시절 나에게 배웠으므로 제자/교수이다 문제는 답사 길에 젊은 교수들은 모두 선글/라스를 쓰고 나만 선글라스가 없었다는 것원래 있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어 그냥 나온 게 잘못이/었다 왜냐하면 답사 길에선글라스를 쓴 젊은 교수들/이 참 멋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답/사 길에는 나도 선글라스를 준비해야 하리라

- 영월 생각

 

 지난 3월에 발표된 ‘비누’에 수록된 몇몇(?)의 수필 같은 시 중 한 편이다. 이 교수는 지난 해 국문과 답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시에 담았다.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는 지난 해 답사에 안경만 쓰고 나타났던 교수님이 올 해 선글라스를 마련해온 사연을 알 수 있어 흥미로워 했고, 기존 문단에서는 형식의 파격 때문에 관심을 가졌다.

 

 “형식과 장르를 깨야 해요. 그것도 집착이거든요. 시는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려야죠. 모든 것이 시가 될 수 있거든요. (앞으로는) 시인지 수필인지 모르겠는 형태로도 쓸 생각입니다. 그래야 됩니다. (형태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에요. 한국 시인들의 병폐는 조로에요. 일찍 늙어요. 그래서 새로운 시도들을 계속 하는 것이죠.”

 

 그렇게 생각하는 이 교수인지라 그는 신인 작가들의 새로운 실험과 시도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학자로도 유명하다. 최근 전통 서정으로 회귀하는 한국 시 문단을 고려할 때 새로운 시도는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교수다. 그러고 보면 그가 그토록 젊은 시인이라고 극찬했던 김춘수 시인만큼이나 그도 같은 이유로 젊은 시인인 듯싶다. '아직도 바람 불면 괴로운' 이 교수와의 인터뷰가 즐거운 까닭이기도 하리라. 

 

학력 및 약력

   
 
 이승훈 (인문대 국문과) 교수는 1942년 춘천에서 태어나 본교 인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석사과정, 연세대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쳤다. 196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을 수상했다. 시집에 ‘사물 A’, ‘환상의 다리’, ‘당신의 초상’, ‘사물들’, ‘당신의 방’, ‘너라는 환상’, ‘길은 없어도 행복하다’, ‘비누’ 등이 있으며, 시론집 ‘시론’, ‘모더니즘 시론’. ‘포스트모더니즘 시론’, ‘한국현대시론사’, ‘한국 현대시 새롭게 읽기’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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