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의 맥박을 찾아서 106 : 사범대 김시태(국어교육)교수

평생 문학과 함께하고픈 '문인', 김시태(사범대·국어교육) 교수

"흔들리는 문학, 친근한 문학으로 돌아가자"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문학과 거리가 먼 이공계쪽 학문은 어떠한가. 하지만 ‘이공계의 위기’라는 말도 그다지 낯설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위기에 처하지 않은 학문이 무엇인가? 이는 데카르트의 말처럼 모든 학문이 하나의 방법론으로 엮여있는 까닭일 수도 있고, 잘못된 사회 풍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방위적 학문의 위기 원인을 문화와 문학으로 대표되는 정신문화의 고갈에서 찾는 이가 있다. 바로 67년 평론으로 등단한 이후 30년이 넘도록 한국 문학을 꾸려오고 지켜온 김시태(사범대·국어교육과)교수가 그다. 문학과 함께해 온 30년, 그가 바라보는 학문의 위기는 이미 예견된 상황이었다.

 

     
 
   
 

문학, 근원적 향수

 

 김 교수는 저서가 많은 편이 아니다. 혹자는 비평가에게 저서가 많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반절이 시인이다. 1940년에 태어나 제주에서 자란 김 교수의 소싯적 꿈은 놀랍게도 정치가. 허나 깨알 같은 글씨의 육법전서는 시력이 나쁜 그에게 좌절을 안겼고, 이후 그는 문학의 길을 택했다. 그렇게 그가 오직 문학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이유는 문학에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이 있다고 믿은 까닭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틈틈이 시를 습작하다 마침내 국문과에 진학해 평론과도 조우를 한 김 교수. 비록 그의 초창기 작품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단 한 권 남겨진 것이 시집 『쳐다보는 돌』(1970)이다.

 

 “창작은 아편과 같은 것이지요. 해서 대학시절까지 같이 해오던 시와 평론 중 시들을 모두 불태워버렸어요. 시를 버린 셈이에요. 이후 평론으로 등단, 활동하고 있던 중에 서정주 선생이 오시더니 느닷없이 옛날 시들을 찾으시더군요. 마침 그 시절 늘 갖고 있던 철제 캐비넷 속에 대학교 3학년 1학기까지 쓴 시들이 돌돌 말려 있어 드렸지요. 얼마 후 느닷없이 ‘현대문학사’에서 전화가 오지 않겠어요? 원고 교정을 보라고”

 

 그는 유달리 ‘은사’가 많다. 때문에 2000년 미당의 빈소에서도, 올 봄 양주동 탄생 100년을 기리는 자리에서도 김 교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스스로도 ‘나는 스승 복이 많다’라 했을 정도로 그에게 영향을 미친 스승은 미당 서정주를 비롯, 조연현, 양주동 등 다양한 분야의 대가들이다. 인터뷰 후에도 인사동에서 마지막 남은 은사님과 약속이 되어있다고 넌지시 귀띔한 그는 어쩌면, 문학을 할 수 있는 환경의 복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고향, 제주도 역시 이러한 복 중의 하나다.

 

   
 

 6월 하순쯤 장마가 들면 / 열흘이고 스무날이고 쉬지 않고 / 끝도 없이 내리는 비, /…/ 그러다가도 잠시 그 비 사이로 / 뙤양볕 째앵 내려쬘 때면 / 왜 그리 두렵고 황당하기만 했는지... /…/ 그런 날은 아무도 없는 빈 집 / 썰렁한 난간에 쭈그리고 앉아서 / 반쯤 감긴 눈 졸다가 말다가 / 시름시름 앓는 게 내 일이었지요. / (후략) -「幼年(유년), 그 장마철」중

 

 “제주도 기후가 좋긴 하지만 주민에게는 부담도 크지요. 알다시피 제주에는 여름에는 태풍, 겨울에는 폭풍이 부는데 비가 내리는 게 아니라 강풍에 날려 솟구쳐요. 그러다 갑자기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며 활짝 개는 때가 있는데, 그 순간이 고독이지요. 고독이 있어야 창작이 가능 합니다”

 

 위의 시와 김 교수의 회고처럼 유년 혹은 옛 기억을 그리워하는 것은 창작의 근원이 된다. 옛 스승을 찾거나, 어린 시절에 파도와 호흡했던 기억 탓에 자신도 바람에 따라 물결치는 성향이 생겼다는 고백도 그가 내재하고 있는 향수의 한 자락이다.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향수』에서 ‘향수(nostalgie)’란 그리스어로 귀환을 뜻하는 노스토스(nostos)와 괴로움을 뜻하는 알고스(algos)의 합성어로, ‘돌아가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라 말한 적이 있다. 젊어서는 시를 불태우며 평론을 하고 한때 10여 년간 절필까지 했던 그가 이제 다시 창작을 하고 싶다는 것은 문학에 대한 근원적인 향수에 이끌린 까닭이 아닐까.

 

문학, 설 자리를 잃다

 

 얼마 전 한 출판인이 추락하는 인문서적 출판현실의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냈다. 중소 출판사가 연이어 부도를 내고 문학서적은 그나마 장편소설 위주로, 상업적 가치가 적은 신간은 출간조차 못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이다. 김 교수는 이러한 문학의 위기에 대해 ‘이는 문학 자체의 위기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얘기한다. 인터넷을 필두로 하는 문학 외의 매체들의 범람은 전 세계적인 보편적 현상임에도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이것이 위기의 원인이 됐다. 물론 이러한 우리나라 문학의 위기에는 취미생활의 다양화 등 여러 요인이 있다. 그러나 핵심은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지나치게 보이는 것에만 치중한 우리나라의 기형적인 발전 탓이라는 것이 김 교수의 지적이다. 이러한 안타까움은 김 교수도 시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중략) / 하지만 이 기쁨도 끝장이 나는 걸까. / 라이브 카페가 들어서고 아스팔트 곧게 곧게 뻗치면서 / 아깝다. 내 비장의 꾀꼬리울음도 욕쟁이할매집도 / 모두들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서글픈 하루」중

 

   
 

 “모든 것에는 양극이 있듯, 문화에도 대중문화와 고급문화가 있어요. 양극이 있다면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를 잘 걸어야 할 텐데 우리나라는 대중문화에 지나치게 치우쳐있는 것이 문제지요. 그렇다고 해서 대중문화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고전적 가치가 있는 고급문화의 층이 얕아지면서 문화가 총체적인 기반을 상실했어요. 이는 결과적으로 보면 70년대 산업화를 거치며 정신보다는 물질에 치중했던 정책의 산물입니다”

 

 정신문화의 붕괴를 막기 위해 20세기 중반 UN은 이를 심각하게 논의, 결의한 바가 있으며 외국 또한 ‘문화보존법’을 시행해 인문학의 맥을 잇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90년대 초, 문화보존 관련 법안의 초안이 있었으나 상정도 해보지 못하고 폐기된 아픈 기억이 있다.

 

“친근함, 그것이 참된 문학”

 

 ‘문학이란 무엇입니까’라는 뜬금없는 질문에 김 교수는 대뜸 문학은 모든 사람의 것이란다. 우문현답이다. 고등학교 때 암기했던 ‘무슨, 무슨 관점’을 논할 것도 없이 문학은 쓰는 사람의 것, 읽는 사람이 것, 그 밖의 취미생활로 즐기는 모든 사람의 것이라 말한 그는 ‘문학은 지금 내가 살고 있음을 확인하는 이유’라는 말로 끝맺는다. 고답적인 말을 늘어놓음으로써 스스로 독자에게 외면 받은 문학에 대한 일침이었다.

 

 “시, 소설뿐만 아니라 평론도 마찬가지에요. 좋은 비평은 독자에게 감동을 줘야하지요. 현학적이고 난삽한 문장이 아닌, 누구나 읽고 즐길 수 있는 평론이라야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지요. 제가 읽었을 때도 난해한 글들을 보면 정말 난감하죠. 해서 전부 읽지 않고 넘어가는 글도 부지기수입니다.”

 

 중학교 교복을 입었을 때부터 이순을 훨씬 넘긴 지금까지 문인으로 살아온 김 교수는 교사를 기르는 사범대학의 교수이기도 하다. 중·고등학교 교사가 된 대학제자들이 인격형성이라는 문학 학습의 본래 이유를 입시 때문에 놓치는 것이 안타깝다는 노교수 김시태. 문학을 가슴이 아닌 머리로 받아들이는 입시현실과 살가움이 사라진 문학작품들이 범람하고 있는 오늘이기에, 그가 강조하는 ‘친근한 문학의’ 부재가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학력 및 약력

 

   
 
 1940년 제주에서 출생한 김시태 교수는 1963년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문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7년 『현대문학』에서 평론「시와 신념과의 관계」로 등단했으며 ‘문학과 비평’의 주간과, ‘신년대’ 동인으로도 활동했다. 1985년 평론집『문학과 삶의 성찰』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는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편집위원, 시문학회 고문 등을 역임 하고 있다. 『현대시와 전통』(1978), 『문학과 삶의 성찰』(1984), 『우리들의 간이역』(1994) 등 10여 편의 저서와 6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제주대를 거쳐 현재 본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진: 권병창 학생기자 magnum@ihanyang.ac.kr
 

 

저작권자 © 뉴스H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