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영 박사 특별전 소개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보급률을 자랑하는 IT 강국이다. 집집마다 있는 컴퓨터는 일상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 된지 오래. 한국이 이처럼 IT 강국으로 우뚝 선 데는 앞선 세대의 기여가 있었다. 전쟁의 풍파를 겪은 한국에서 최초의 컴퓨터를 만든 고(故) 이만영 박사도 그중 하나다. 한양대 교수로 재직했던 이만영 박사는 1962년 국내 최초의 아날로그 전자계산기를 만들었다. 현재 박물관에서는 이만영 박사의 생애를 조명한 특별전을 진행 중이다. 이번 전시에 이만영 박사의 아들인 이정훈 교수(전자공학부)와 동행했다.

 

 

시골 청년 이만영, 1세대 유학생이 되다

 

   
▲ 격동의 시기를 지낸 고(故) 이만영 박사의 신분 증서들. 민
병대원, 대학교수,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 등을 지냈다.

이만영 박사는 한국의 유학생 1세대다. 유학 인구가 적었던 시절이니 부유한 집안 자제일 거라 추측하기 쉽지만 실상은 다르다. 이 박사는 1924년 경기도 광주군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열악한 교육 환경 탓에 양질의 교육을 받지 못 했다. 공업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서 일을 하다 1924년엔 일본군에 징병됐다. “아버지께서는 일본 본토로 징병되셨어요. 만주나 한반도보다는 안전한 편이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셨죠.” 이정훈 교수의 말이다. 일본의 패전으로 전쟁터에서 돌아온 이 박사는 공부의 뜻을 품고 1945년 경성대학에 입학한다.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경성대학의 바뀐 이름)를 졸업한 이 박사는 6.25 전쟁 전까지 현재의 급전소격인 조선전업 급전실에서 근무하게 된다.

 

6.25 전쟁 발발 이후 피난처인 부산으로 자리를 옮긴 이 박사. 부산의 급전실에서 미군 사령관 스미스 대령과 인연을 쌓는다. 스미스 대령은 유능함을 알아보고 미국에서 공부할 것을 권했다. 마침 한미재단이 문교부를 통해 유학생을 모집하고 있었고, 이 박사는 스미스 대령의 추천서를 받아 유학생으로 선발됐다. “학생 신분으로는 비행기를 탈 수 없어서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18일에 걸쳐 미국으로 갔다고 합니다. 시작부터 험난한 유학 길이었죠.” 미국에 정착한 이 박사는 콜로라도 대학에서 전기공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는다. 한미재단 지원금이 도중에 끊겼음에도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을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자랑했다.

 

졸업 후에는 한동안 미국에 살았다. 이 박사는 한국인 최초로 보잉사에 입사한 인물이었다. 보잉사에서 2년을 근무한 뒤, 자신의 능력을 국가를 위해 쓰기로 결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국내 여러 대학 중에서도 공학인재를 키워 나라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한양대 설립자 고(故) 백남 김연준 박사의 말에 감명받아 한양대학교 교수로 부임한다.

 

   
▲ 한미재단에서 발행한 추천서와 콜롬비아 대학교 재학 중 사용한 필기 노트. 이만영 박사는 한미재단의 유학생 선발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으로 건너간 1세대 유학생이었다.

 

 

국내 최초의 전자계산기를 만들다

 

   
▲ 한양대 교수로 부임한 이만영 박사는 청계천에서 부품을 조
달하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제자들과 함께 국내 최초의 전자계
산기를 만들었다. (출처: 한양대학교 박물관)

교수로 재직 중이던 때, 이만영 박사는 고차원 미분방정식을 일일이 손으로 풀며 해설하는 강의 방식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아날로그 컴퓨터를 이용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아날로그 컴퓨터는 엄청난 고가의 물건이었고, 이 박사는 결국 자신이 직접 컴퓨터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컴퓨터 제작에 필요한 부품이 전무하던 시절이에요. 미국에서 사용하는 컴퓨터 도면을 참고하며 청계천 고물상에서 미군용 통신 기기의 필요한 부품을 사 왔죠.” 이 박사와 그의 제자들은 수십 번 넘게 청계천을 드나들며 밤샘한 끝에 컴퓨터를 만들었다. 선형 미분방정식 해석용으로 제작한 국내 최초 아날로그 계산기 제1호의 탄생이다.

 

1호 제작을 발판 삼아 더 고차원의 계산이 가능한 제2호 전자계산기를 만들었다. 상용화해도 손색이 없을 수준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1963년 불의의 화재로 이 박사가 공들여 발명한 전자계산기 1, 2호가 소실되고 만다. 김연준 박사는 당시 실의에 찬 이 박사에게 다시 한 번 더 만들어볼 것을 격려했다고 한다.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직접 하신 만큼 상심이 크셨을 거예요. 그래도 한번 더 완성품을 만들어보겠다고 마음을 다잡으셨다고 합니다.” 마침내 이 박사는 상처를 털어내고 제3호 대규모 전자계산기를 완성한다. “당시 모든 신문에서 이 소식을 다뤘어요. 일본의 산케이 신문도 대서특필할 만큼 엄청난 발명이었어요. 전문 부품이 없어 청계천에서 가져와 만든 것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고 해요.” 이 박사의 제3호 전자계산기는 현재 생산되고 있는 국산 컴퓨터의 효시라고 평가된다.

 

   
▲ 이만영 박사는 통신, 암호와 정보 보호 분야에 많은 저서를 남겼다. 우리나라 산업 기술 발전에 기여한 이만영 박사의 공로는 그의 저서에서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묵묵히 걸어온 학자의 길

 

   
▲ 이정훈 교수(전자공학부)는 부친을 아직까지 기억해주고
특별관을 찾아주는 사람들에게 많은 감사를 전했다.

이정훈 교수는 부친을 추억하며 말했다. “사실 아버지와는 많은 기간 동안 떨어져 생활했기에 함께한 추억이 많지는 않아요. 항상 바쁘셨으니까요. 자서전 출간을 도와드리면서 뒤늦게 알게 된 부분이 많았죠. 늘 자신의 연구 분야에 충실하셨고, 연세가 많이 드신 뒤에도 학업에 열정을 가지고 다양한 업적을 내신 점이 자랑스럽습니다.” 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은 우리대학의 소장품인 제 3호 전자계산기(등록문화재 제558호)와 이정훈 교수가 보관하고 있던 유품을 대여받아 기획한 것이다. “아버지의 유품들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한양대에서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는 특별전을 열어줘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늘 아버지에게 도움을 주신 고(故) 김연준 초대 총장과, 김종량 이사장님께 감사를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특별전을 찾아 이 좋은 날 아버지를 추억하고 기억하는 분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만영 박사 특별전은 한양대 박물관 3층 테마전시실에서 진행하고 있다. 관람시간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매주 일요일과 국경일, 공휴일에는 휴관하니 참조할 것. 한국 산업 기술의 발전상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글/ 이종명 기자        tmjo2000@hanyang.ac.kr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사진/ 김윤수 기자      rladbstn625@hanyang.ac.kr

       김혜임 기자      hitgirl827@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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