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 대한 이해는 언론인으로서의 필수 자질"

386세대, 신보수, 뉴라이트...
변혁의 시대, 어디에서도 통일된 목소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증거이기도 하며 말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어느새 우리 곁에 자리 잡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주의, 그 중심에는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다양한 스펙트럼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언론의 자유는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언론에 수많은 재갈을 물렸던 현대사의 끝이 제도권 안에서 정비된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대 언론의 굴절사를 현장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고 언론 자유에 대해 학술적 발전을 이끌어 온 이가 있다. 바로 박영상(언정대·신문방송) 교수다. 의욕 넘치던 젊은 기자에서 교수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한 평생 언론 자유를 반추하며 살아온 박 교수를 위클리한양에서 만나봤다.

 

   
 

박 교수의 인생 여정이 처음부터 언론계로 향했던 것은 아니다. 고교 졸업 후, 그는 가톨릭대 신학부에 입학하며 성직자로서의 삶을 기약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당시의 시대상은 박 교수의 뜨거운 열정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63년 신학부 예과를 수료한 뒤, 곧바로 본교 신문학과에 입학하며 언론인으로서의 출발을 준비한다.

 

“당시는 조국 근대화라는 허울 속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억압된 상황이었습니다.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높아질수록 당면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움직여보고자 하는 노력을 했었던 시기였죠. 따라서 내게 대학시절은 저널리스트로서 인생의 좌표를 설정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졸업과 함께 박 교수는 합동통신에 입사, 언론인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무릇 삶이란 끊임없는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라고 한다. 유신과 자유에 대한 탄압, 언론 검열 등으로 대변되는 박정희 정권은 젊은 기자의 양심과 인내력만으로 버티기엔 한계가 있었다.

 

“굳이 표현의 자유나 다원주의 같은 거창한 말로 표현할 필요도 없이 현장에서 접한 권력의 추악함은 직업에 대한 환멸을 느끼도록 했습니다. 그 당시 나의 양심은 어느 누구와의 타협도 거부했고, 한편으로 8년여 간의 현장에서의 경험을 체계화 하고픈 욕심이 결국, 또 다시 날 학문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그 뒤, 박 교수는 미국 미주리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수학하고 본교 신방과 교수로 재직하며 지금껏 한양 언론을 이끌어 오고 있다.


위기의 신문, 그러나...

 

현장에서의 경험과 객관적 시각을 자랑하는 학자로서의 오랜 경류에도 불구하고, 박 교수는 여전히 현장의 가까이에서 미디어 개혁을 목도하고 있다. 한국언론학회장(98-00년), 관훈클럽 편집위원(2002) 등을 비롯해 현재까지도 언론중재위원으로의 활동하며 실천하는 원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기자 출신이라는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 박 교수는 급격한 저널리즘 환경의 변화 앞에 선 신문의 위기에 대해 할 말이 많다.

 

   
 

“지금 신문이 겪고 있는 위기는 미디어 혁명의 과정에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파퓰러 저널리즘이 나를 중심으로 한 Specialized 저널리즘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입이다. 미디어 발달이 매체의 다양화를 촉구했고, 그로인한 시장질서의 변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박 교수가 말하는 신문의 위기란 존폐의 문제가 아닌 경쟁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과거와 같은 독점적 지위권의 신문이 아닌 사회적 합의를 유도하며 의제 설정을 중심으로 한 고급지로의 도약을 기대했다.

 

“9시 뉴스의 정보량이래야 신문 두 면이 채 되지 않습니다. 정보량으로도, 수용자들의 매체 집중도로도 신문은 다른 매체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의 강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 신문 시장의 위기는 한국 언론이 거듭날 수 있는 큰 발걸음으로 해석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변화무쌍한 삶의 환경과 우리 인생을 이어주는 가교가 다름 아닌 신문인 까닭이다.

 

“똘레랑스, 이분법 사고에서 탈피해야”

 

몇 해 전부터, 정치계와 언론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진보와 보수의 지형도는 대학사회에서도 논의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그럴수록 사회 전반에 서 있는 대립의 각은 높아만 갔다. 평소 저널리즘의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와 신뢰성을 강조했던 박 교수. 근래에 미디어를 소비하고 생산하는 주체로서의 대학생들에게 인생의 어른으로서 한 마디를 더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 의지는 결국, 모순된 생각과 충돌로 귀결 되게 마련입니다. 그 차이를 존중할 때, 합리적 결론에 도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보여 집니다. 이분법적 사고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 결여가 아닐까요? 학생들이 좋아하는 똘레랑스란 단어는 진보적 입장의 해석이 아닌 상호적 이해와 관용을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을 염두 해 두길 바랍니다”


제자들에겐 인생의 가르침이 되어

 

언정대 신방과 학부생들은 전공이 결정되면서 맨 처음 선배들로부터 듣게 되는 말이 있다고 한다. 졸업 전, 반드시 박 교수의 수업은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제자들로부터의 진심어린 존경은 무엇보다 큰 기쁨일 것이라 생각됐다. 그래서 언론준비반에서 오늘도 땀 흘리는 제자들을 위한 언론사 합격의 비결을 물었다.

 

“그런 거 다 운입니다. 공부해야 할 범위의 끝도 없고, 자질을 평가하는 방법도 지금으로선 틀렸습니다. 단, 자기 글에 대한 책임과 사회 전체를 바라 볼 수 있는 안목과 여유를 갖길 바랍니다.”

 

연신 담배를 피워 물며 툭툭 내뱉는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제자들에 대한 속 깊은 정을 느낄 수 있었다.

 

1983년, ‘뉴스는 만들어진 사실이다’라는 자신의 첫 논문으로 국내의 뉴스에 대한 시각과 정의를 넓히며 화려하게 시작한 학자로서의 길도 이제 20년 하고도 두 해가 지났다. 그럼에도 자신의 학자로서의 삶을‘게으름’이라는 말로 겸손해하는 노교수에게서 한양과 함께한 큰 어른의 더 큰 그릇을 발견할 수 있었다.

 

최근 박 교수는 자신의 은퇴를 즈음해서 ‘언론자유’에 대한 포괄적 정의와 학문적 체계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 현대언론사를 주도면밀히 관찰해온 그로써는 당연한 욕심일지도, 민주주의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언론자유에 대해 20세기 언론 학계를 지켜온 그로서는 응당 가져야할 책임일지도...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함께 한 박 교수. 그리고 21세기 정보화 시대로 접어들며 새로운 패러다임에 놓인 언론. 그 연결점에 지금 박 교수는 서있다. 이것은 얼마 후면 탈고될 세월을 담은 그의 원고가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다.


사진 : 조정필 학생기자 iuni@ihanyang.ac.kr 

 

학력 및 약력

 

   
 

박영상 교수는 본교 신문학과를 졸업하고, 합동통신에 입사, 8년 여간 현직 기자 생활을 해 왔다.이후, 미국 미주리대학에서 저널리즘 석사와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그는, 83년부터 현재까지 본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이다. 방송위 연예오락위원(94), 한국언론중재위원(97) 등을 거쳐 98년부터 2000년 까지한국언론학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박 교수는 현재는 삼성언론재단 이사, 언론중재위원회 서울 제2중재부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언론과 철학’, ‘초고속 통신망 수용과 정책방향’, ‘뉴스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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