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나의 작은 힘이 일궈낸 큰 불빛

나는 예전부터 '인도' 하면 '신화와 모험의 나라' 이렇게 어렴풋이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살아왔다. 2005년 6월. 드디어 나는 인도로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출국 일이 다가올수록 '누가 실종됐다 더라.' '누가 죽었다.' '델리에 뇌수막염병이 돈다.'등 갖가지 무서운 소문들과 신문 등에서 접해온 이슬람교와 힌두교사이의 테러소식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곧 눈앞에 펼쳐질 신세계에 대한 기대감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결국 가이드와 뚜렷한 일정도 없이 오지에서도 믿을만한 두 친구와 함께 비행기 표만 달랑 가지고 인도로 떠났다.

 

   
 

처음 밟은 인도 땅은 컬쳐쇼크(culture shock) 그 자체였다. 떠나기 전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하고 떠났지만 현실은 상상보다 더욱 험난했다. 길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들, 영국식의 딱딱한 영어 발음과 힌두어식의 발음까지 합쳐진 기상천외한 영어발음, 대마초를 피며 악기연주하며 놀고 있던 사람들, 어딜 가나 끊이지 않는 거지들의 구걸행진, 섭씨 40~55도까지 올라가는 덥다 못해 뜨거운 기온까지… 이런 요인들은 내가 인도에 도착한지 4시간도 안돼서 "아 씨 뭐 이런 나라가 다 있어." 라고 내뱉게 했다.

 

그렇다. 나의 인도에 대한 첫인상은 이렇게 잔인했다. 어차피 편안한 여행은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어디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사막에 있는 도시들을 여행했다. 여행가는 곳마다 외국인이라곤 우리일행 딱 3명뿐인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인도사람들이었다. 그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많은 인도 사람들과 친해졌다. 인도 꼬마아이들은 우리가 신기했는지 모두 '할로!'를 외치며 지나갔고, 사진 한 장을 찍다 보면 모두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나의 파티에 와주지 않으면 총으로 너희를 쏘겠다.'고 농담하던 호텔주인아들 야두,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제대로 된 직장도 없고 가난하다고 우리 앞에서 넋두리를 늘어놓던 결혼한 지 한 달 된 새신랑, 우리에게 friend를 넘어서 brother라고 부르며 호의를 보인 Lucky. 열악한 환경이지만 사람 사는 모습을 보고나니 처음 가졌던 안 좋은 인상도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한 달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캘커타에서 보낸 2주이다. 36시간이나 기차를 타고 도착한 캘커타라는 도시는 영화 city of joy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캘커타에 가보니 자원 봉사하러 오신 한국 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온갖 사기란 사기는 다 당하고 산전수전 다 겪고 난 후라 그 분들과의 만남이 너무 반가웠다. 그분들과 함께 캘커타에 머무는 동안 친하게 지내며, 정말 많은 도움을 받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래는 캘커타에 3~5일 정도만 머무르려는 일정을 잡았지만, 오전에 봉사활동하고, 오후에 주변 여행을 하다 보니 어느새 2주나 지나있었다.

 

   
 

캘커타는 테레사 수녀님이 '사랑의 선교회'를 처음으로 세우시며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시던 곳이다. 지금은 이러한 테레사 수녀님의 노력 덕택에 40년 전만해도 빈민굴에 거리에 구더기와 쥐들에게 파먹여 죽어가는 사람들로 가득하던 이곳이 전 세계에서 봉사자들이 모여들어 사랑이 넘치는 city of joy로 변해있었다. 테레사 수녀님에 대해서는 조금은 알고 있었지만 인도에 와보니 얼마나 대단한 분이셨는지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봉사를 하러 다녔던 곳은 장애가 있어 몸이 불편한 아이들과 고아들을 돌보는 나보지반(새로운 삶)이란 곳이었다. 처음엔 아이들을 씻기고 밥 먹이는 일이 고되기만 하였다. 그 곳에서 친해진 친구가 있었는데 인도에서 고아로 태어나 마더하우스에서 길러지고 벨기에로 입양되었는데 다시 고향을 찾아와 봉사활동을 하러 온 친구였다. 그 친구는 아이들을 돌볼 때 자기 아이들인 것처럼 돌보고 다른 봉사자들과는 사뭇 다름 모습으로 정성스레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고되기만 하던 봉사활동도 '나도 여태껏 다른 이들에게 받은 사랑을 이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나누어 주어야겠다' 는 생각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더 큰 빚을 지고 돌아왔다. 내가 그들을 돌보아 주었다기보다 내가 더 많이 배우고 왔기 때문이다. 그곳을 떠날 때 쯤 되니 아이들 이름도 알고 누가 어디가 불편해서 무엇을 해주어야 된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고 처음에 나를 무서워하던 아이들도 나중에는 내가 가면 알아보고 놀아 달라고 달려들었다. 그렇게 인도에서 몇 주 지내고 보니 인도에 와서 첫날밤 느꼈던 그 것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룽기를 두르고 길거리식당에서 인도인들과 같은 식사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인도는 갈등과 분쟁, 가난이 매연처럼 뒤덮고 있지만 그 매연을 조금만 걷어보면 누구도 그들을 가난하다, 불행하다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 나의 조금만 손길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배우고 돌아왔으니 20대의 첫 도전, 이만하면 대 만족 이다.

 

글 : 김영일(공과대·도시환경건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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