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의 맥박을 찾아서 137

 고고학 연구 통해 한국인을 업그레이드 한다

 한국 고고학자 1세대

 고고학 통해 우리문화 우수성과 민족적 자긍심 고취에 이바지 해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 떠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존스박사, 고고학자인 그가 세계를 떠돌며 모험을 즐기는 장면을 본 이 들은 어린 시절 한번쯤 그가 되고 싶은 꿈을 가져 봤을 것이다. 하지만 미지의 어두운 땅속을 파헤치거나 혹은 어느 순간 마주할 수도 있는 낯선 곳에 대한 위험요소들은 때론 고고학자들에게 크나큰 심적 부담을 주기도 한다. 이렇듯 현실 속의 고고학은 영화처럼 멋져 보이는 화려함 뒤에 고고학자들의 피나는 노력이 숨어있다. 인간이 남긴 유적 ·유물과 같은 물질 증거와 그 상관관계를 통해 과거의 문화와 역사 및 생활방법을 연구하는 고고학자들, 이러한 고고학은 국내에선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초기의 척박한 환경과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의 원류를 찾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1세대 고고학자들 중에는 지난 24일 열린 교수정년퇴임식을 가진 김병모(한양대ㆍ문화인류학과)교수가 중심에 서 있었다.

 

   
 

 고고학과의 만남

 

 김 교수과 고고학의 인연은 그의 대학시절부터 이어져왔다. 그와 첫 대면에서 기자가 던진 첫 질문은 고고학이 가지는 가장 큰 매력이 무엇이냐는 물음이었다. 김 교수는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서슴없이 “여행”이라고 단호히 답했다. 반도 국가인 탓에 외국 여행이 쉽지 않았던 시절, 고고학을 전공하면 여행을 충분히 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소박한 희망이 오늘날의 그를 고고학 속으로 빠져들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전했다.

 

 “알타이 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시절, 스키타이 민족의 무덤(카자흐스탄에 위치)을 조사해보고 싶었습니다. 러시아가 문호를 개방하고 인문학 연구자들이 광활한 시베리아와 스텝지대를 자유롭게 탐사할 수 있었죠. 비로소 글자로만 접하던 알타이 문화를 피부로, 육성으로 만날 수 있었음은 참으로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하지만 기후적인 탓에 습지인 그 곳을 차나 도보로 이동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고심 끝에 함께 동행한 카자흐스탄 국립박물관 관장에게 헬리콥터를 요청했죠. 마침 카자흐스탄의 나제르바이예프 대통령이‘한양대 경영연구소’의 초청으로 산업시찰 차 다녀간 적이 있었습니다. 즉시‘방문당시 당신과 만찬을 같이 했던 김 교수입니다’라고 서면을 보냈죠. 친근함을 무기로 삼아 해결책을 찾은 셈이죠”

 

 최초로 스키타이 민족의 무덤을 항공 촬영한 김 교수.‘ 네셔널지오그라피’에도 실린 이사진은 세계최초의 항공 촬영 사진이었다. 그때의 모습은 마치 존스박사처럼 영웅적인 모습을 방불케 했다며 그는 말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Dolman Crescent’

 

 김 교수가 40년간 행해온 수많은 연구 업적을 살펴보니, 그가 한국 고고학계의 산 증인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김 교수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연구업적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건네자 그는 노트북을 펼쳐 한 장의 사진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사진 속에는 국내 고인돌과 한민족의 선조인 기마민족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세계화를 추진함에 있어서도 우리 것을 제대로 알아야 힘을 얻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민족이 형성되려면 백성들이 있어야 합니다. 전 어떤 민족이 모여서 한민족을 형성했는지 궁금했죠. 한반도에는 주로 북아시아적 요소와 남아시아적 요소가 같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솟대 문화는 기마민족인 몽고 문화이며 쌀은 따뜻한 지방의 문화입니다. 벼농사를 짓는 남아시아 사람들의 또 하나의 증거가 고인돌이죠. 우리나라에는 고인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이 고인돌이 왜 이렇게 많은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죠. 당시만 해도 고인돌에 대한 연구는 일본 학자가 우리나라에 고인돌이 있다고 언급할 정도의 미비한 연구 결과가 전부였죠”

 

 조선후기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누볐던 실학자 김정호처럼 김 교수는 동남, 북 아시아 각 등지에 현존하는 고인돌을 찾아 발품을 팔았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dolman crescent’지도가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의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학창시절 한민족은 단일 민족이며 단군의 자손이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남아시아에는 단군이 없습니다. 단군할아버지는 기마민족의 시조로 하늘에서 내려온 주인공이라는 천생신화와 한반도에서는 알에서 태동했다는 난생 신화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신화학자들이 제시한 지도에 의하면 북아시아에서는 전자가,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후자가 전해오고 있죠. 이 두 가지 현상이 한반도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신화학자가 그린 지도와 제가 그린 반달모양의 지도와 거의 일치해요. 경제를 뜻하는 벼농사와 풍속을 나타내는 고인돌 그리고 사유체계를 설명하는 난생신화가 일체가 되는 문화현상이죠. 한민족 구성 과정을 생각할 때 이 부분을 간과하고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한민족도 이렇게 복잡한 과정과 다단한 뿌리를 기초로 이루어진 백성이라는 것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목민족이 한반도를 언제 오게 됐는지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한다.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 그는 앞으로 더 많은 땅을 걸어야 될 것 같다고 말한다.

 

 한국박물관의 인식 높이다

 

 김 교수는 한국 고고학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12년이라는 긴 세월을 세계박물관대회를 국내 유치에 투자했다. 그 노력의 결실로 마침내 제 20차 총회 세계박물관대회가 58년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에서 열린 쾌거를 거뒀다. 2004년 10월에 열린 이 대회에는 영국 대영박물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등 세계 유명 박물관 관계자들과 석학들 2000여명이 대거 참석했다. 대회 주제가 ‘박물관과 무형문화유산’인 만큼 그는 이번 기회야 말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무형문화자산을 알리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고.

 

 “당시 방문단의 80%는 한국이 처음이었을 정도로 한국에 대해 생소했습니다. 일본이나 중국에 가려져 있는 샌드위치 국가 정도의 인식수준이었죠. 하지만 작두위에서 춤을 추는 강렬한 샤머니즘, 첫날 궁중의상 및 전통 결혼식, 종묘 재래악 등의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보여주었죠. 민주 공화국에도 불구하고 아직 왕조의 문화를 잘 지키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그들을 한국문화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웃음)”

 

 하지만 대회 유치를 통해 한국문화를 알리고 싶었던 것 외에 또 다른 목적도 있었다. 바로 박물관 문화 정립이었다. 당시에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알릴 한국적 문화콘텐츠나 박물관 컨벤션 산업은 최고를 지향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문화적 여건이 조성돼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박물관의 부재였다.

 

 “현재 미국의 박물관수는 2만개, 중국은 1만개, 영국은 5000개, 일본은 3000개인 반면 우리나라는 고작 300여개에 불과합니다. 박물관 문화에서는 후진국인 셈이죠. 수많은 자료가 은하수처럼 흩어져 있으면 그 문화의 총체적인 모자이크가 보이질 않습니다. 한 곳에 모을 집중력이 필요한 셈이죠. 그래서 세계대회 행사를 통해 국내 지식인과 정책 결정자들에겐 우리 박물관·미술관에 대한 인식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저돌적인 힘으로 파고들어라

 

   
 

 김 교수는 한양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꾸준한 고고학 연구를 강행하다 83년 문화인류학과 창설이후 새로운 보금자리로 옮겨왔다. 사회 진출에 임박한 제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적당주의를 버리라’는 것. 적당히 해서는 어떠한 것도 만족할 만큼 성과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인생철학이다. 그는 젊은이들에게는 무엇이든 굳은 각오로 파고들 수 있는 저돌적인 힘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연배는 태평양 전쟁 중에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혼란스럽던 시대에 저는 대학교수를 꿈꿨어요. 그래서 'one-way 티켓'을 끊고 무조건 해외 유학을 떠났죠. 박사학위를 따지 않으면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돌파력 때문에 오늘날의 한국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이 시대를 이끌어온 사람들의 생활철학이라고 할 수 있죠”

 

 40여 년 동안 정든 교정을 떠나는 김 교수에게 마지막으로 한양인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기자의 질문에 분위기는 잠시 적막해졌고 김 교수의 여유로운 휘파람 소리도 멈춰버렸다. 아쉬움과 흐뭇함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그는 말을 이었다.

 

 “젊었을 때 더 고생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넓게 보려면 어디로든 떠나보세요. 언젠가 일본작가 이시다 유스케의「가보기 전에 죽지 마라」는 책을 감명 깊게 봤던 기억이 나네요. 7년 동안 자전거로 세계를 종ㆍ횡단 여행을 한 주인공의 이야기지요. 많이 경험해본 사람은 그만큼 지혜로워지니까 스스로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가보기 전에 절대 죽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고고학과 인류학을 통해 한국인을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 김 교수의 최종적인 목표라고 한다. 고학을 통해 학위까지 받아온 탓에 집안이 넉넉하지 못해 학업의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는 김 교수,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블라디보스크로 밀항해 기차를 훔쳐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파리까지 가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김유라 취재팀장 gurapoet@ihanyang.ac.kr
사진: 변 휘 학생기자 hynews69@ihanyang.ac.kr

 

 

 학력 및 약력

 

   
 

 김병모 교수는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나 1965년 서울대 문리대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했다. 71년 이탈리아 국제문화재센터에서 수학했고 71,72년 영국 런던대학교 고고학 연구소를 거쳐 78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했다. 79년 본교 사학과 교수로 부임 후 83년부터 문화인류학과 교수를 맡으셨다. 79년에서 97년 까지는 한양대 박물관장을 역임했고 한국고고학회 회장, 한국전통문화학교 초대 총장, 2004 ICOM(세계박물관협회) 서울 총회 공동조직위원장을 맡으셨고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보관훈장을 수여받았다. 현재 ICCROM(국제문화재센터)이사, ICOM 윤리위원, 고려문화재연구원 원장, 외교부 문화협력 대사를 맡고 있으며 한국 고대사 연구 및 다양한 국제교류를 가짐으로서 우리문화의 우수성과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키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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