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걸(세계일보 논설위원·영어영문학과 84)
데드라인이 주는 엄청난 중압감
내 전공은 영문학이었지만 교실보다는 학생회관 3층 신문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월등히 많았다. 막차도 끝난 시간이면 학생회관 경비 아저씨의 눈을 피해 위험천만하게도 선홈통(빗물을 내리기 위해 지붕에서 땅바닥까지 수직으로 댄 홈통)을 타고 신문사에 들어가 밤새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들곤 했다. 이렇게 선후배들과 일탈 생활을 하다 보니 정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학과 수업을 얼마나 소홀히 했던지 시간에 몰려 방학 숙제 리포트를 베껴서 제출했다가 영문과 김일곤 교수님의 지적을 받고는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기사를 쓰면 고료가 나왔다. 학교 앞 중국집 ‘진미루’에서 외상 자장면을 배달시켜 먹고는 원고료가 나오면 뭉텅이로 갚았다. 묘하게도 기사를 마감하는 날, 그 전달 원고료가 지급됐다. 그러면 우리들 (주무, 학생편집국장, 외국인 지도교수, 기자 등 20여 명)은 파티를 했다. 한 달 고료는 하루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증발되기 일쑤였다. 학생들이 무슨 스트레스냐고 하겠지만 데드라인을 정해놓고 영어로 기사를 작성하는 일에는 엄청난 중압감이 있었다.
나는 영문과 학생이었지만 영어에 목말라했던 곳은 강의실보다는 오히려 신문사였다. 2학년 때 과락률이 높아 악명을 떨쳤던 ‘The Norton Anthology of English Literature(영문학사)’ 과목을 들었는데 2학기 때 ‘자율 펑크’를 냈다(지금 한양대 교무처장이 된 김성제 조교께서 백지 답안지를 내라고 조언했다). 영어 실력이 갖춰진 4학년 때 재수강을 했는데 교수님이 채점을 하면서 ‘이 학생이 누군가?’라고 물을 정도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영자신문사에서 먹고 잔 덕택을 본 것이다.
혹독했던 겨울 방학 집중 훈련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영자신문 기자들은 겨울 방학 때 집중적으로 훈련을 받았다. 해병대 훈련에서 육체적 고통이 통과의례 라면, 영자신문사 훈련에서는 정신적 고통이 통과의례였다. 교관들 (선배들)은 <주간조선>을 한 페이지씩 찢어준 뒤 이튿날 오전까지 번역, 제출하는 숙제를 냈다. 주어를 찾다가 밤을 꼬박 새고는 아침에 벌게진 토끼 눈을 서로 확인하고는 허리를 꺾었다. 눈이 쌓여 발이 푹푹 빠지는 진사로를 오르다가 도망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엉터리 번역을 제출해야 하는 것이 낯 뜨거웠고, 선배들의 ‘사랑의 매(당시에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가 무서웠다. 하지만 이 과정을 견뎌내야 영자신문 기자로 인정받았다. 회초리를 드는 선배들을 욕하고, 가슴을 후벼 파는 면박에 반감을 키우면서도 묘한 고마움을 느꼈던 시절이었다.
그리곤 우리도 선배가 됐다. 후배들을 잡는 역사가 반복됐고, 견디 지 못한 후배들은 등을 보이기도 했다. 후배들의 반발에서 설명하기 힘든 배신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치열했던 신문 제작 과정
1개월에 한 번 4페이지 또는 8페이지씩 만드는 신문(당시는 스탠더드 판형)인데, 제작 과정이 치열했다. 격론이 오가는 기획회의에서 기사와 필자가 선정됐다. 교내외 취재(대학로 공연을 고정으로 다룸)를 한 뒤 영어로 기사를 작성했다. 학생부장이 수정하고 학생편집국장이 다시 첨삭했다. 그리고 외국인 교수가 교정하고 한국 지도 교수가 오케이 사인을 내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기사가 완성됐다(당시는 반정부시위 절정기인 1980년대 중반으로 안기부에서 학생들의 동태를 살필 때였다). 최종 원고는 신촌에 있는 삼영인쇄소로 넘겨졌다. 신문을 받아들고는 새벽에 진사로에서 배포했다. 신문을 받아보는 학생 들의 얼굴을 볼 때 스스로 뿌듯하고 대견스러움이 가슴에 꽉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The Korea Herald>가 1985년 대학영자신문 콘테스트를 했는데 <The Hanyang Journal>이 대상을 받았다. 이듬해에도 최우수 편 집상과 우수 기사상을 받았다. 상패를 들고 총장께 보고하러 갔다가 격려금을 받은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선후배 간의 끈끈한 정
신문 제작 과정에 피땀을 쏟았기에 선후배와 동료들 간 끈끈한 정이 쌓여갔다. 사회에 진출해 잘나가는 선배들을 보고는 따라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연합뉴스 일본 지사장을 두 번이나 했던 김용수 선배는 후배들의 귀감이 됐다. 일본 정부 문서를 찾아내 위안부 기사를 국내에 처음 보도해 한국기자협회에서 시상하는 올해의 기자상 을 잇따라 받았다. 여러 후배들이 그를 본받아 기자가 되려고 밤잠 안 자고 노력했다. 가을바람이 불 때 언론사 입사 시험을 치러 다니면서 문턱이 얼마나 높은지 절감했다. 번번이 낙방했지만 가끔 학교에 들러 막걸리를 사주는 선배들의 격려에 마음을 다잡곤 했다. 지금은 영자신문사 출신들이 제법 많이 일간지와 방송사로 진출해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연합뉴스는 물론이고 KBS, MBN, 세계일보, 한겨레, 동아일보, 스포츠서울, 코리아타임스, 코리아헤럴드, 문화일보 등에 기자 또는 PD를 배출했다. 내가 기자가 된 것도 <한양저널>과의 인연 때문이다. 한양대 이영무 총장과 김성제 교무처장도 영자신문사 출신이다.
전공이 각기 다른 별동대로 구성된 학생 조직 중에서 매우 다양한 곳에 인재를 배출한 게 영자신문이 아닌가 싶다. 원래 <The Hanyang Times>로 창간한 뒤 1980년 초 강제 폐간됐다가 복간되면서 <The Hanyang Journal>로 태어났다. 복간된 6월 중순 전후로 홈커밍데이 모임을 개최한다. 사회 진출 뒤 만나기가 여의치 않았던 선후배들이 학교에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는 기회다. 해산할 때 왕십리 골목길에서 발을 구르며 주먹을 흔들면서 구호를 외친다. “H, I can. Y, I can. T, I can. Hanyang Hanyang Times, Ya!” “Leaves, we do. Grass, we do. Leaves of grass, Hanyang Hanyang Journal, Ya~”(Leaves of Grass는 월트 휘트먼의 시 제목)

사자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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