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는 나를 존재하게 한 힘이자 내 인생이라고 할 수 있어요.” 대한민국 배구의 자존심 강만수 동문(체육 ‘78년 졸)의 말이다. ‘아시아의 거포', '천둥소리’로 불리는 그는 현역시절 타고난 신체조건과 힘, 잘 다져진 기술을 바탕으로 코트를 지배했다. 선수부터 감독까지 그가 걸어간 발자취는 돌처럼 묵직한 그의 스파이크만큼이나 강렬하게 남아있다.

배구와의 인연

강 동문이 운동과 인연을 맺은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또래들보다 유난히 큰 키 덕분이었을까. 본격적으로 배구를 하기 시작한 중학교 3학년 시절까지 그는 구기 종목 선생님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핸드볼을 시작했어요. 특별활동 시간에 어떤 선생님께서 공을 한번 받아보라고 하시면서 핸드볼 공을 던지셨는데 잘 받았어요. 그래서 핸드볼 시합을 나가게 됐죠. 그렇게 핸드볼을 하다가 중학교에 진학했는데 배구부와 축구부가 있었어요. 처음에 축구를 했는데 골키퍼 연습이 너무 힘들었어요. 연습하다가 하늘이 노랗게 보일 정도였죠. 신발도 맞는 게 없어서 남들이 준 신발을 신다 보니 사이즈가 작아서 다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다른 선생님께서 배구를 권하셨어요. 그렇게 축구하다가 배구하다가 번갈아가면서 했어요.”

중학교 3학년 시절, 그는 힘들었던 축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배구를 시작했다. 178cm의 큰 키를 앞세우며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애초 계획했던 서울 지역 학교를 진학하는 대신 부산 성지공고를 선택하게 된다.

“축구가 조금 힘들기도 했지만 자연스럽게 배구를 택하게 됐어요. 축구 감독님, 배구 감독님께서 서로 데려가려고 하셨는데 결국 배구를 하게 됐죠. 고등학교는 큰물에서 놀아야겠다는 생각에 서울 쪽으로 진학하려고 했는데 많이 맞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가려던 학교 대신에 선배가 있던 성지공고로 가서 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죠. 근데 더 맞았어요(웃음).”

그가 들려주는 국제 무대 이야기

그는 성지공고로 진학한 뒤 차근차근 기본기를 다져갔다. 성실한 그의 노력이 빛을 발했던 것일까. 1972년 고 3이었던 그는 구기 종목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영광스러웠죠. 고 3때였는데 감독님이랑 동료 선수들이 태릉선수촌까지 데려다 줬어요. 당시 경기에는 뛰지 못하고 주전자만 들고 다닌 탓에 ‘뮌헨올림픽의 주전자맨’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그 때는 대표 선수가 됐다는 그 자체가 매우 영광스러웠어요.”

30여 년이 지났지만 강 동문은 1972년 뮌헨 올림픽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북한을 상대로 한 치열하고 살벌했던 예선 경기부터 올림픽 기간 때 오히려 체중이 늘어났던 일까지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낯설고 떨리는 첫 경험이었다.

“프랑스 생디에에서 올림픽 예선이 열렸어요. 북한과 붙게 됐는데 그 때 북한 사람을 처음 봤어요. 1970년대라 남, 북한 선수 주변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따라다닐 정도로 서로 적대적이던 시기였어요. 말이 통하니까 서로 욕할 정도로 살벌했죠. 질 줄 알았는데 3:1로 이겨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처음으로 국제무대를 경험한 일이라 그런지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아요. 당시 어려서 시합에는 못 나가고 대신 주전자 들고 따라다니고, 먹고 또 먹는 일의 반복이었어요. 시골에서 자란데다가 70년대라 먹을 것이 부족했는데 독일 올림픽 선수촌에 음식이 정말 많은 거예요. 선배들은 시합에 뛰느라 오히려 살이 빠지셨는데 전 다른 사람들은 신 맛 때문에 못 먹는 양젖(지금의 요거트)까지 몸에 좋다고 먹고 또 먹어서 오히려 체중이 불었어요.”

그는 1972년부터 1984년 LA올림픽까지 13년 동안 국가대표로 뛰었다. 강 동문은 1973년도부터 국가대표 주전 레프트로 뛰기 시작했는데 강 동문 외에 김호철 동문(체육 ‘80년 졸)을 비롯한 배구 인재들이 태릉선수촌으로 들어오면서 배구 국가대표팀은 조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탄탄한 조직력은 성적에 직결되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6위, 1978년 로마세계선수권대회 4위에 이어 방콕아시아경기대회와 이듬해 열린 멕시코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는 연이은 금메달 획득이라는 쾌거를 만들어냈다.

“가장 전성기였던 1984년 LA올림픽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를 그만뒀어요. 사실 올림픽 메달을 딴다는 게 정말 힘든 일이잖아요. 흔치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 열심히 했는데 LA올림픽에서 일명 ‘져주기 경기’가 일어났죠. 우리가 브라질한테 이겼는데 미국이 브라질한테 져주기를 하는 바람에 우리가 결국 떨어졌어요. 선수들은 열심히 앞만 보고 임했지만 그때 우리 국력이 약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미국 팀한테 우리도 강하단 것을 보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우리 팀이 잘 하니까 미국은 일부러 떨어뜨리려고 한 거거든요. 그런 게 참 안타깝죠.”

일본 생활, 힘들었지만 많은 것을 배운 시기

전성기를 달리던 1984년, LA 올림픽을 끝으로 강 동문은 은퇴를 선언한다. 그는 이후 일본 와세다대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그를 일본으로 이끈 것은 운동하느라 부족했던 학업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이었다. 일본 생활을 시작한 후 그는 선수와 학생, 가장의 역할까지 해내야 되는 바쁘고 힘든 시기를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견뎌냈다.

“대학 재학시절 매일 운동하고 태릉 선수촌에 있느라 공부를 많이 못 했어요. 그래서 유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가 기회가 돼서 가게 됐어요 당시 큰 애가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됐을 땐데 3학년 편입으로 들어가서 공부도 하고 선수 생활도 하면서 지냈죠. 항상 같이 다녔던 매니저들이 참 고마웠어요. 제가 공부할 때나 운동할 때 항상 따라다녔거든요. 그들이 제 팔, 다리나 마찬가지였어요.”

처음 그가 와세다대학에 갔을 당시 와세다대학은2부 리그에 속해 있었다. 그가 합류하고 얼마 뒤 와세다대학은 33년 만에 우승을 했고, 그 뒤부터 지금까지 1부 리그에 속해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학원 시절 속해있던 실업팀 도레이에서도 강만수의 저력은 여실히 발휘됐다. 도레이는 강만수의 합류로 14승 전승으로 니혼리그에 올라갔다.

“여러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이 많은데 그 중에서 와세다대학이 33년 만에 우승한 것, 도레이팀이 2부에서 1부로 올라간 것 등이 제일 기억에 많이 남아요. 폭발적인 성적 상승 덕분인지 당시 일본팬이 엄청 많았어요. 한국팬보다 오히려 일본팬이 많았으니까요.”

많은 팬들에게 관심을 받을 만큼 잘해내고 있었지만 그의 일본 생활은 즐겁지만은 않았다.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와 문화적 차이로 인한 부적응은 그를 연신 괴롭혔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호화롭지 않았어요. 배구 시합을 주말에만 하는데 시합 후 월요일 하루 쉬는 날이었어요. 그런데 월요일 아침 9시부터 수업이 있어서 쉴 시간 없이 바로 수업에 임했었죠. 근데 그렇게 해도 와세다 대학교에서 2년 안에 졸업을 못했어요. 위내시경도 2번이나 받을 정도로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한국에서처럼 2년 안에 졸업 하는 게 무리더라구요.”

“일본에는 도시락이나 주먹밥이 잘 돼 있잖아요. 주말에 매니저가 그걸 사주면 갖고 전철을 타고 한 시간씩 가서는 경기를 했어요. 경기 전 스탠드에서 도시락을 먹고 시합을 했는데 하루에 두 번씩 시합할 때도 있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죠. 대한민국에서 나름 이름 있는 선수였는데 그런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부분들이 처음엔 적응이 안 되더라구요. 또 일본 선수들은 뭘 시켜도 앞에서는 싫은 척 절대 하지 않고 엄청 열심히 하더라구요. 정말 강한 애들이었죠.”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녔던 감독 시절

일본에서 돌아온 그는 조금씩 키워오던 지도자의 꿈을 펼칠 기회를 얻었다. 바로 1993년 현대자동차서비스 배구단 감독을 맡게 된 것이다. 그는 고려증권에 밀렸던 팀을 1994년 대통령배, 1995년 슈퍼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그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감독직을 처음 맡았을 때 가르치는 것보다 선수들을 관리하는 부분이 더 힘들었어요. 저도 선수 생활할 때 겪었지만 감독이 되니까 또 다르더라구요. 근데 그런 부분들을 단속하고 대화를 해야 멀리서도 저 선수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이 돼요. 그래서 선수들과 대화하는 데 많이 무게를 뒀죠.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선후배 관계에서 후배가 선배한테 대든다든지, 연습할 때 선배라고 해서 쉰다든지 하는 부분이에요. 개개인의 실력차이는 어쩔 수 없지만 연습 시간에 집중하지 않는 것, 감독으로서 그건 절대 용납 못하는 부분이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선수 생활이 더 낫죠. 선수는 경기 때만 열심히 하면 되지만 감독은 경기가 끝나고 나서도 쉬지를 못하니까요. 시합 하나하나에도 피가 말라요. 지면 못 먹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고 그래서 몸도 많이 상했어요.”

이렇게 지도자로서 하나하나 노력하던 그에게도 시련이 다가왔다. 1997년, 그 해 창단한 삼성화재가 슈퍼리그 우승을 휩쓴 것이다. 잘나가던 현대자동차서비스는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는 결국 잠시 코트 밖을 떠나있게 된다.

“근데 사실 배구하는 사람은 배구장 안에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팀이 너무 적어서 한 번 나오면 들어가기 힘들어요. 서로를 자르고 서로를 밀어내야 들어갈 수 있으니까. 굉장히 힘들죠.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 레스토랑도 하고 도넛 가게도 하고 그랬어요. 근데 그게 참 힘들더라구요. 안 해본 일인데다가 하루 종일 붙잡고 있고 왔다갔다하고 새벽까지 있어야 하는 부분들이 너무 힘들었어요.”

이후 그는 8년 만에 KEPCO45의 감독을 맡게 된다. 아마추어 집단에서 시작한 KEPCO45는 비록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초반 부진을 딛고 차근차근 올라가고 있었다. 자신의 구상에 맞게 팀을 꾸려가고 있던 그에게 갑자기 날아온 경질 소식은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사실 KEPCO45에 있을 때 선수들도 열심히 따라줬고 성적도 좋았어요. 그러다가 느닷없이 경질이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좀 의아했죠. 성적도 좋았고 회사에서도 좋아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짠한 마음이 들더라구요. 적어도 3년은 내다봐야 한다고 보는데 많이 아쉬웠죠. 처음 아마추어 집단을 데리고 시작해 그 다음 해에는 선수들 보강을 해서 3,4차전은 무난하게 잘 했거든요. 그 뒤 본격적인 구상을 시행하려는 3년 차에 그만두게 된 거죠. 사실 아마추어 시절을 제외하면 제대로 한 건 1년밖에 안됐던 거죠.”

중간에 물러났지만 그는 현대 시절 팀을 4번이나 우승시킬 정도로 뛰어난 역량을 보여줬다. 그는 자신이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외모로 인한 오해를 꼽았다. 평소 사람 좋아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는 그는 오히려 코트 안에서는 이러한 평가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겼다. 외모 만으로 자신의 지도력을 평가 받는 것 같아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실제로 본 그에게서는 부드러운 외모에서 풍겨 나오는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었다.

“제일 싫은 게 사람이 좋아 보인다는 말이에요. 평소에는 괜찮지만 코트 안에서 좋아 보인다는 건 별로 좋은 게 아니거든요. 가르치는 것과 사람 좋은 것은 다른데 사람들이 오해를 해서 힘들어요. 화도 못 내는 줄 알고 감독을 안 시키더라구요. 그게 제일 안타까워요. 감독직을 수행할 때는 한없이 부드럽지는 않거든요. 정말 잘 못 했을 때는 따끔하게 혼내야 해요. 제가 감정적으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선수가 정말 잘 못했을 때 벌을 주기 때문에 선수들도 대부분 수긍을 해요. 그렇다고 혼만 내서는 안되죠.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줘야 하죠.”

배구 현실에 대한 단상, 그리고 그의 꿈

오랜 시간 동안 배구와 함께 해 온 그는 잠시 코트 밖에 나와 있는 지금도 배구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특히 그는 팀 수 부족, 홍보 부족 등을 현 배구계의 문제로 꼽았다.

“팀이 너무 부족해요. 6개 팀을 가지고 우수한 성적으로 세계 대회에 나가는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을 거예요. 일본만 해도 고등학교나 실업 팀이 상당히 많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는 선수들이 너무 없어요. 어린 청소년을 많이 키워주고 실업 팀이 많이 생겨야 체계적으로 육성할 수 있는데 팀이 너무 적으니까 배구를 안 하려고 하는 추세로 가게 되는 거죠. 다 수용을 못 하니까요. 배구가 활성화되려면 야구처럼 2군이 생겨야 해요. 2군이 생기게 되면 스무 명이 넘게 참여할 수 있으니까 충분히 활성화 될 수 있다고 봐요.”

“홍보 부족도 안타까운 점이죠. 요즘 배구가 재미없다는 말이 많이 들리는데 홍보가 잘 안되니까 그런 말들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이렇게 매체가 발달한 시기에 이를 잘 활용만 하면 배구에 대해 많은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있을 텐데.”

홍보 부족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던 그였기에 성균관대와의 라이벌매치는 배구 활성화의 한 방안으로 더욱 뜻 깊은 자리로 다가왔다.

“진작 이런 경기를 했어야 하는데 늦은 게 안타까워요. 그래도 시작이 반이라고 이렇게 시작하게 돼 정말 기쁘게 생각해요. 늦었지만 이렇게 경기를 한다는 자체가 뜻 깊고, 이것을 계기로 사람들이 배구에 관심을 갖고 더 활성화됐으면 좋겠어요. 옛날에는 고등학교도 라이벌매치를 할 정도로 굉장히 활성화되어 있었는데 근래 들어 다 없어진 것이 안타까워요. 연고전 같이 라이벌매치를 자주 해야 학생들도 응원하면서 쌓였던 스트레스도 풀고 배구도 활성화될 수 있다고 봐요. 이번에 처음 하는 거니까 정말 열심히 잘해서 프로 시합처럼 최선을 다해야 장기적으로 기대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 라이벌 매치는 배구 활성화뿐 아니라 동문들끼리 모일 수 있는 흔치 않은 자리라는 점에서 더욱 뜻 깊은 자리다. 이번 라이벌 매치에서 단장을 맡은 강 동문도 이를 통해 동문들이 더욱 끈끈해졌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동문들끼리 모일 수 있는 자리가 없었는데 라이벌매치 연습을 한다고 하니 정말 많은 수가 왔어요. 배구 홍보나 동문들 간의 교류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번 라이벌 매치는 긍정적이라고 봐요. 지금까지 학교에 대해 소홀한 측면이 있었는데 이번 경기를 통해 애교심도 고취시킬 수 있을 거라 봐요.”

선수 선배로서, 또 인생의 길을 먼저 걷고 있는 인생 선배의 눈으로 후배들을 보면 안타깝고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지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에 비해 약해진 후배들의 체력을 걱정하는 그에게서 따뜻한 후배사랑이 느껴졌다.

“당시와 비교하면 지금 후배들은 키는 굉장히 큰데 다들 체력이 다소 약한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이 좀 안타까워요. 기본기부터 차근차근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요. 기본기나 체력이 정말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기본기라는 게 중, 고등학교 때 배워오니까 실업 팀에서 다시 가르치려고 해도 잘 안 되더라구요. 아무리 가르쳐도 몸에 익은 게 있으니까 배울 때만 되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잊어버리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후배들은 기본기를 배울 때 좀 더 착실히 잘 배워서 초석을 잘 닦고 왔으면 좋겠어요.”

“인생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말은 무언가를 바라기 보다는 최선을 다 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요. 어떤 분야든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다 보면 길은 자연스레 열리는 것 같아요. 요즘 보면 무언가를 바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게 바라고 있기 보다는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하다 보면 길은 자연적으로 열린다고 생각해요.”

그와 배구는 오랜 시간 함께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그에게 배구란 그를 존재하게 하는 힘이자 그의 인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늘도 그는 코트 안에 있는 강만수를 꿈꾼다. 코트 안에서 지도자로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 배구밖에 모르는 그의 최종 목표이자 꿈이다.

“배구 인생을 돌아보면 만족스럽죠. 어릴 때부터 배구 외에 다른 것은 해 본적이 없어요. 배구를 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알아주고, 매체에도 실리는 등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코트 안에서 지도자로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는 바람이 있죠. 제게 배구란 나를 존재하게 해 준 것이자 인생 그 자체니까요.”

박혜림 취재팀장
hellohyel@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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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및 약력

우리대학 73학번으로 입학한 그는 와세다대학교와 도카이대학교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아시아의 거포로 이름을 알린 그는 1972년부터 1984년까지 남자배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활약하며 7,80년대 한국 배구의 부흥을 이끌었다. 그는 타고난 신체조건과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일본 도레이 배구단, 아랍에미리트 알자지라 클럽 등 아시아 곳곳에서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7년 간의 유학생활을 마친 뒤에는 현대자동차서비스 코치, 감독직을 맡으며 현대자동차서비스의 우승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2009년부터 2011년 3월까지는 수원KEPCO45의 감독으로 팀을 이끌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코트 위를 사로잡는 그는 현재 한양대 OB팀의 단장을 맡으며 다시 한번 지도자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길 희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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