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한양제일리뷰대회 가작 수상작 (작곡과 유상민)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도서관은 총체적 지식의 창구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구립(또는 도립)의 도서관 또는 대학교 도서관에서는, 한 사람이 하루 24시간 평생을 꼬박 읽어도 다 읽지 못할 분량의 책들이 비치되어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언젠가 절판된 희귀 서적을 복사하기 위해서 국립중앙도서관을 방문했었던 기억이 있다. 도서관 속, 그 광활한 공간으로, 국내에서 출판된 모든 책들은 납본되자마자 그곳에 보관된다. 새 책이 수없이 써내려 지는 지금도, 그 책들은 그 공간 속으로 곧게 향하고 있다.

도서관에서, 어떠한 책을 빌리기 위해 여러 서재를 돌아다니며 지나친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지식의 습득, 융합, 통섭 등 다양한 상태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아마,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의 노에시스(Noesis)와 노에마(Noema)로 말할 수 있는, 현상학적 환원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은 도서관임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만화에서, 우리가 흔히 꿈을 꾸며 자고 있는 사람 위에 말풍선을 달지 않는가. 이처럼 나는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보이지 않은 말풍선들을 상상하면서, "그들의 의식 속에서는 어떠한 지식의 향연들이 일어나고 있을까?"라는 다소 유치한 상상을 하며 나의 책을 찾아 나선다.

그렇기에 한양대학교의 산 중턱에 위치한 백남학술정보관(중앙도서관)에 들어갈 때에는, 나는 여느 공간보다 ‘경건함’과 ‘겸허함’이라는 특별한 감정이 생기곤 한다.

누군가의 삶 속에서, 그들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출근길 지하철을 탄다. 어느 사람의 한 손에는 단어장, 누군가의 한 손에는 휴대폰, 다른 이의 한 손에는 지갑들을 쥐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 개찰구를 통과한다. 애지문(愛之門)을 지나며 어떤 이들의 사랑을 품고, 하르트만의 건축물인 <키예프의 대문>을 연상시키는 고성(古城)과 같은 본관 건물을 바라본다. 길고 긴 오르막길을 올라, 도서관 로비의 엘레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한 층, 그리고 한 층마다 서성이며, 내 의식이 이끄는 주제의 책을 찾아 한 권 옷깃 속에 품어 넣는다.

엘레베이터를 타기 전 찰나의 순간에, 나는 그의 작품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필연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양대학교 백남학술정보관 1층에 전시된 그 작품은, 아티스트 백남준의 『TV 첼로(1971)』다. 찰나란 “눈 깜짝할 사이”로 표현되는, ‘75분의 1초(약 0.013초)’의 물리적 시간을 함의하고 있지 않은가. 이 짧은 찰나 속에서, 그의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으로부터, 나는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50년이라는 영겁의 시간을 두고 일종의 '예술적 교감'을 하게 된다.

 예술가 백남준과 『 TV 첼로 』

대한민국에서 괴테 메달을 수여받은 이는 '윤이상(1995)', '백남준(1998)', '김민기(2003)' 세 명뿐이다. 윤이상(1917~1995)은 오리엔탈리즘 사조로 동/서양의 음악과 문화의 회통을 성공적으로 시도한 작곡가이다. 그가 고안해낸 주요음기법 그리고 주요음향기법과 같은 작곡 기법들은 작곡학도들에게, 한국 전통적 음악 요소들의 운용은 후대의 한국 음악학도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김민기(1951~)는 <아침이슬>로 대표되는 저항가요를 부르짖은 가수이자 작곡가이다. 그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연출을 통하여 세계를 무대로 그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 가능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백남준(1932~2006)은 비디오 아트라는 장르를 개척한 세계적인 전위예술가이다. 그의 대표작품으로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과 『다다익선(1988)』이 있다. 1984년, 조지 오웰이 그의 소설 <1984>에서 예견한 불길한 예측이 틀렸다는 것을 역설한 작품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통해 생중계되어 미디어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기념으로 만든 작품인 『다다익선』은 개천절을 상징하는 1003개의 CRT TV 모니터로 구성된 18.5m의 비디오 타워로 구성된 작품이다.

CRT TV 모니터 3대, 비디오 분배기 1대, 플렉시글라스, 첼로 헤드, 첼로 테일피스, 첼로 현, 2-채널 비디오, 컬러, 무성 그리고 DVD로 구성된 작품인 『TV 첼로』는 그의 다른 대표작인 『다다익선』과 같은 모니터라는 출력 장치와 미디어를 매개로 한 비디오 아트이다. 2018년,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다다익선』은, 브라운관 모니터 노후화로 인해 가동을 중단했다. 『TV 첼로』도 마찬가지다. 『TV 첼로』를 구성하고 있는 3대의 모니터도 언젠가 『다다익선』처럼 노후화되어 망가질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른 후에는, 그 부품조차 단종되어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작품은 전자기기가 사라진 채 ‘DVD(미디어)’만 남게 된다. 그러면 그것을 『TV 첼로』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노후화되어 망가진 모니터를 최신 모니터로 바꿔보자. 제작될 당시의 원형의 부품이 아닌 그 작품을 『TV 첼로』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러한 딜레마들은 우리에게 무수한 미학적 질문들을 내던진다. 이 딜레마의 중심에서는 아날로그(구문물)와 디지털(신문물)를 규정짓는 담론이 자리한다.

장자의 제물론 : ‘아날로그와 디지털’, ‘구문물과 신문물’, ‘과거와 현재’

한 노인이 마침 밭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굴을 뚫고 우물에 들어가는 항아리를 안아 내다가는 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애를 써서 수고가 많은데 그 효과는 아주 적었다. 자공이 말했다. “여기에 기계가 있으면 하루에 백 이랑도 물을 줄 수가 있습니다. 조금만 수고해도 효과가 큽니다. 댁께선 그렇게 해보실 생각이 없습니까?” …… “나는 내 스승에게서 들었소만, 기계를 갖는다면 기계에 의한 일이 반드시 생겨나고 그런 일이 생기면 반드시 기계에 사로잡히는 마음이 생겨나오. 그런 마음이 가슴속에 있게 되면 곧 순진 결백한 본래 그대로의 것이 없어지게 되고, 그것이 없어지면 정신이나 본성의 작용이 안정되지 않게 되오. 정신과 본성이 안정되지 않는 자에겐 도가 깃들지 않소. 내가 두레박을 모르는 게 아니오. 도에 대해 부끄러워 쓰지 않을 뿐이오.” / 장자 <천지>

장자 시대의 노인에게서 두레박이라는 기계는 ‘신식’이고, 항아리를 이용하는 방법은 ‘구식’이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서 어느 순간에는 두레박이 구식이 될 것이다. 반대로 장자의 시대보다 이전에 토기를 굽는 기술이 부족했을 때에는 항아리를 사용하는 방법이 신식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에 관한 논의의 필요성이 자리하는 것이다.

아날로그란 어떠한 데이터를 연속적으로 변환하는 기법이고, 디지털이란 어떠한 데이터를 2진수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과 아날로그’에 관해서는 현대에서는 조금 더 확장된 의미로 쓰인다. 어느 작가는 자신은 컴퓨터로 원고를 쓰는 것을 디지털 방식이라고 하며, 자신은 원고지에 연필로 글을 쓰는 아날로그 방식을 선호한다고 말하곤 한다. 또한 어느 작곡가는 컴퓨터로 음표를 수놓아 사보를 하는 방식을 디지털로, 종이로 된 오선지로 사보 하는 것을 아날로그 방식이라고 지칭하며 컴퓨터로 사보 하는 것을 획기적인 기술로 칭한 바가 있다. 더 나아가서, 누군가는 검색 기능과 SNS 기능이 탑재된 스마트폰을 디지털 기술로 규정하고 스마트폰의 탄생은 아날로그를 고수하던 본인에게는 충격적인 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이렇듯,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개념은 확장되어 구문물과 신문물을 규정짓는 담론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다시 글을 쓰는 작가로 돌아가 보면, 그가 선호하는 방식인 원고지에 글을 쓰는 것은 수백 년 전의 조상들에게는 ‘디지털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관점에서는 현재 ‘디지털 방식’이라고 일컫는 컴퓨터로 자판을 쳐서 원고를 작성하는 방식은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후에는 지극히 ‘아날로그적 방식’으로 치부될 수 있는 방식이다.

위에서 인용한, 자공이 여행을 하면서 만난 한 노인의 예도 이와 같이 적용해볼 수 있다. 자공이 향유했던 당시의 시대에서, 굴을 뚫고 우물에 들어가는 항아리를 안아 내다가는 밭에 물을 주고 있는 방식은 ‘아날로그적 방식’이며 두레박이라는 기계를 사용하는 것은 ‘디지털 방식’이다. 하지만, 자공이 태어나기 이전에는 굴을 뚫고 밭에 물을 주는 방식은 ‘디지털 방식’이었고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두레박이라는 기계를 사용하는 것은 ‘아날로그적 방식’이다.

포스트-코로나 시대, 『TV 첼로』가 시사하는 의미

시대의 지성이라고 불리는 작가 이어령(1934 ~)은 2006년 그의 저서인 『디지로그』를 통하여 ‘디지로그의 시대’를 선언한다. ‘디지로그’란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경계를 관통하는 개념이다. 이어령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공존’을 꾀하여, 이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해나간 것이다. 『TV 첼로』에서 파생된 미학적 물음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에서 ‘구문물과 신문물’으로, 결국에는 ‘구문물과 신문물’에서 ‘과거와 현재’로 꼬리를 물고 이어져 갈 것이다. 궁극적으로 표상되는 ‘과거와 현재’는 그와 나의 예술적 교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담론을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시대에 적용하면 무엇을 지칭해야 할까. 현대의 시대에서는 원초적인 의미의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훨씬 뛰어넘어, 4차 산업 혁명과 그 이전의 시대를 나누는 경계로 지칭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앞서서 현재의 상황에서는 ‘Covid-19’라는 펜데믹이 시대상을 나누는 명확한 기준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콜라주가 오일 페인팅을 대신하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다.” - 백남준

우리의 일상과 세계는 수많은 경계와 맞닿아 있다. ‘경계’는 양자를 분리시킴과 동시에 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은가? 4차 산업 혁명과의 경계, 포스트 코로나 시대와의 경계 등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의 ‘경계(접촉면)’에 맞닿아 있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백남준의 『TV 첼로』도 궁극적으로 ‘캔버스’와 ‘브라운관’의 경계(접촉면)에 서서 일종의 예술을 역설한 작품이다. 우리도 펜데믹 앞의 경계면에 서서 미래를 개척해야 할, 어쩌면 시대를 짊어지게 될 사명감을 부여받은 것이다. 이것이 『TV 첼로』를 사이로 두고, 백남준과 나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종의 ‘예술적 교감’인 것이다!

이와 같이 백남준의 『TV 첼로』는 내게 있어서는 예술적 교감을 가능케 하는 사물이자, 사회에서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성찰적 화두를 던지는 일종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백남학술정보관에서는, 지(智)의 최전선에서 밤낮없이 사유하고 성찰하는 한양인들로 가득하다. 그 아래의 작품 속에서는, 언제나 백남준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어제의 도서관에서도, 내일의 도서관에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을 작품 『TV 첼로』를 통해서, 나는 그와 예술적 교감을 이룬다.

해당 글은 한양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리뷰글 공모전 '2020 한양제일리뷰대회' 수상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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