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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불행의 원인 중 하나는 극단적인 도농격차다. 뜬금없는 가설이나, 뜯어보면 낭설만은 아니다. 서울·수도권의 일극집중(一極集中)은 한정 자원의 무한쟁탈을 뜻한다. 집값 폭등의 배경이다. 일자리를 독점하니 떠나기는커녕 지방인구의 사회 전입까지 반복된다. 반면 지방은 사람도 돈도 별로 없다. 이대로라면 인적 끊긴 지방소멸은 정해진 미래다.

글. 전영수 글로벌사회적경제학과 교수

자원집적의 클러스터가 만든 서울경제학

서울은 숱한 재료가 뒤섞인 대표적인 집적지다. 많은 걸 가졌고 더 가질 태세다. 인구도 돈도 기회도 서울만큼 위력적인 곳은 없다. 입소문·선경험은 자석처럼 강력하게 주변 자원을 흡수한다. 뭐든 끌어당겨 ‘서울블랙홀’로도 불린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항목 불문 마찬가지다. 서울공화국을 탓만 해선 곤란하다. 일극화의 자원집적은 개별주체의 합리·효율적인 기대가설에 기반한다. 한데 모이면 낫다는 클러스터 추구 효과다. 금융이 여의도에, 벤처가 테헤란로에 집중되는 식이다. 생태계가 모이면 플랫폼이 강화되듯 집적 가치는 탐색·거래비용을 낮춘다. 15~24세 청년인구가 ‘지방⇨서울’로 향하는 이유다. 서울발 ‘교육⇨취업’의 연계 고리도 비교우위에 있다. 좋은 일자리와 직결된 스펙·평판을 서울이 움켜쥔 결과다.

서울 성벽은 견고하고 육중하다. 어떤 수도도 서울보다 일극집중은 덜하다. 인구밀도·GRDP(지역총생산) 등 양적 경제로는 최고 수준이다. 유명기업 본사의 70~80%는 물론 신규취업 60~70%가 서울에서 이뤄진다. 생활 인프라까지 가세한다. 공공기관(117개), 대학(48개), 요양기관(2만2683개), 문화시설(111개)이 밀집해 있다(2019년). 국토의 0.6%뿐인 서울이 엄청난 GRDP(423조 원·22%)를 갖는 배경이다(2018년). 서울은 여전히 배가 고프다. 급등세·수급 붕괴로 전 국민의 시름이 된 서울 아파트는 시가총액이 2014년 626조 원에서 2019년 1233조 원으로 뛰었다(10월 기준). 살인적인 독주다. 범서울권인 경기·인천을 넣으면 집중도는 한층 높아진다. GRDP(990조 원·52%)만 절반 이상으로 수도권 인구 비중과 일치한다(52%). 2명 중 1명이 사는 12%의 땅덩이가 만든 성과다.

서울의 미래 선택 ‘디스토피아 vs 유토피아’

서울은 기울어진 운동장과 닮았다. 성벽 안팎의 금권(金權) 여부로 소수의 빗장인구와 다수의 추방인구로 엇갈린다. 빗장 안쪽의 폭탄 돌리기는 계속되기 어렵다. 올더스 헉슬리(A.L.Huxley)의 소설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를 움직이는 약인 ‘소마’처럼 월급과 일자리 탓에 시간은 벌 수 있어도 조건부일 수밖에 없다. 소마는 동경이 아닌 경계 대상이란 것을 후속세대는 넓고 높아지는 빗장에서 절감한다.

그렇게 반발·포기는 가속화된다. ‘취업⇨연애⇨결혼⇨출산⇨자가(自家)’의 인생 과제를 거부하는 트렌드까지 나왔다. 계층이동이 막혔기에 ‘빚더미의 미래 고통⇨나다움의 현재 유희’는 자연스럽다. 기괴한 빗장도시의 독특한 폭주 기행에 맞선 달라진 청년의 등장이다. 빗장도시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개별 치부(致富)의 노림수가 집단 우울의 자충수로 전락하지 않도록 묘책 마련이 요구된다. 상황 방치는 곤란하다. 지금이 미래 서울을 둘러싼 ‘디스토피아 vs 유토피아’의 승부처다.

한국은 곧 인구가 준다. 자연증감(출생자-사망자)은 2019년 마이너스를 찍었다. 국제유입 덕에 총인구는 당분간 좀 늘어도 하향반전은 시간문제다. 총원이 주는데 한 곳이 늘면 어디선가는 줄어든다. 지방권역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도시밀집과 농촌과소는 이음동어의다. 참고로 인구밀도 최하위인 강원도 인제군은 19.3명뿐이다.

개개인의 사회이동은 합리적인 선택이나, 사회 전체로는 비용 유발과 불균형을 낳는다. 지속가능성의 훼손이다. 한쪽은 넘치고, 한쪽은 부족해 자원배분의 유효 활용을 가로막는다. 집적도 시의 자원쟁탈보다 심각한 것은 ‘한계취락(인구의 반 이상이 65세 이상 노인으로 공동체로 존재하기 어려운 마을)’의 기능부전 문제다. 관심도 의지도 비켜선 외로운 소멸공간인 탓이다.

답은 뒤틀린 무게중심의 균형 회복뿐이다. 이대로면 도시·농촌의 역내 분업은 깨진다. 농촌이 서울을 떠받친다는 점에서 생태계의 건강한 연결망이 중요하다. 답은 ‘로컬리즘’이다. 한국의 앞날은 농촌의 오늘이다. 지방이 죽으면 나라도 죽는다.

소멸 경고 속 한계의 과소농촌

인구충격은 차별적이다. 맷집 좋은 도시는 버텨도 취약해진 농촌에는 치명타다. 서울생활권은 몰라도 기타권역은 시한부 환자 신세다. 미래가 없으니 청년이 떠나는 건 당연지사다. 남아달라 애원한들 명분·실리 모두 빈약하다. 지방권역의 박탈감과 모멸감은 일상사다. 천정부지의 서울 집값에 난리지만, 88%의 국토 공간은 배제된 방관자일 따름이다.

저성장발 디플레이션이 심화하면 지방은 회생조차 어렵다. 유령 마을은 예약된 상태다. 발걸음이 멈춰선 곳에 돈이 돌 리 만무하다. 아직은 고령인구로 연명하나, 다사(多死) 사회가 본격화되면 미래는 없다. 경고는 구체적이다. 2015년 일본 정부가 발표해 화제를 모은 소멸산식(20~39세 여성/65세 이상=0.5 미만)을 2020년 한국에 넣으면 226개 기초지자체 중 소멸 위험지역은 105곳에 달한다.

당사자로선 맘이 급해진다. 해마다 축소되는 지역 단위 각종 통계는 실존적인 위협 수치다. 탄탄했던 지방거점 대학마저 구조조정을 입에 담는다. 규모·범위의 경제로 버텨왔던 지역 상권은 가속적인 폐업 소식에 속수무책이다. 한계·과소의 딱지를 떼지 않는 한 몰락은 기정사실인 까닭이다. 진정성은 달라졌다. 능력은 차치하고 의지만큼은 높아졌다. 선거 시즌이면 활성화 실현 공약이 선순위를 차지한다. ‘하면 좋은’ 것이 아닌 ‘꼭 해야 할’ 절체절명의 해결 미션으로 받아들여진 결과다.

환경은 익었다. 지역균형뉴딜처럼 중앙 예산까지 풀리며 재생사업을 떠받친다. 미약하나마 고무적인 신호도 있다. 작지만 하나둘 성과를 내는 사례다. 그래도 고민스럽다. 가성비는커녕 부작용을 양산한 과거 경로를 반복할 수 있어서다. 이름만 바뀐 채 형식·내용은 비슷한 과거 정책의 재구성 혐의도 구체적이다. 호기(好機)가 실기(失機)가 될지 염려하는 시선을 받아들일 때다.

발상의 전환과 새로운 도농균형책

뉴노멀에 맞는 새로운 도농균형론의 기획·실행이 필요하다. 당장 목적의 재구축이 먼저다. 무엇을, 누구를 위한 활성화인지 목적성을 분명히 하자는 취지다. 이와 관련해 과거 방식은 오히려 역내 불균형을 심화시켰다. 하드웨어적인 토건사업 위주라 일부만 단발 혜택을 받을 뿐 대다수의 순환경제는 실현되지 못했다. 허술한 수요조사로 사업 이후 흉물로 방치되고 추가적인 운영비까지 내는 곳이 많다.

짓고 닦는 활성화도 필요하나, 중요한 건 주민 행복의 담보 여부다. 고루 혜택이 돌아가고 길게 지역에서 살아남는 활성화가 바람직하다. 다음은 방식의 재구성이다. 행정이 모두 한다는 사고 체계는 과거 유물이다. 시장 실패만큼 정부 실패도 많다. 대안은 행정주도형 하향식보다 주민참여형 상향식이다. 공공예산을 넣어도 거리두기와 내려놓기는 필수다.

지역활성화는 ‘지역’이 중심일 때 바람직하다. 기획도 실행도 평가도 지역이 주체일 때 효과적이다. 한국의 지역활성화는 갈 길이 멀다. 개선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경우 당사자보다 외부자의 입김·이해로 결정된다. 40여 년의 균형발전론이 도농불균형을 낳은 배경이다. 추진내용부터 진행방식까지 천편일률적인 토건 중심의 전국구 범용모델이 아직도 표준적이다. 해서 어디든 판박이처럼 황폐해진다.

지역은 모두 다르다. 입지·역사·산업·인구·성향 등 똑같은 곳은 없다. 전국표준을 적용하면 편하긴 해도 남는 게 없다. 차별화된 그들만의 활성화가 탐색·거래·감시비용을 줄이고 지속적인 성과 창출로 직결된다. 중앙은 지역을 응원·지원하면 충분하다. 규제·예산 등의 권력 하방으로 스스로 행복해지는 지역 시스템을 키워줘야 한다. 그걸 해주는 게 자치분권의 논리다. 수많은 성공 사례의 공통분모로 거론되는 게 지역 중심 로컬리즘이란 건 우연의 일치일 수 없다.

지역회복 이끌 로컬리즘의 성공 조건

‘중앙일괄⇨지역자생’의 방향 전환에도 의문은 남는다. 지역은 준비돼 있는가의 이슈다. 논쟁거리인 게 달라진 활성화를 추진할 능력과 의지가 지역 공간에 갖춰졌는가의 물음이다. 자치분권이 이뤄져도, 로컬리즘이 선택돼도 이를 실행할 자생·내발적인 에너지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방치된 한계취락 특유의 폐쇄성·무력감을 벗겨내는 게 먼저다.

귀촌·귀향 10년을 넘겼어도 ‘서울 것’이란 호칭으로 역차별하면 지역은 생존할 수 없다. 번거롭고 힘들지만 다양한 이해관계를 공론화해 타협·조율하는 참여 및 결정구조가 로컬리즘의 전제조건이다. 원주민만 고향 주인은 아니다. 활성화는 최대한 많은 이들이 인적자원으로 연결될 때 지속된다. 리더십 등 지역행정은 기획부터 실행·관리까지 직접적인 당사자성을 품도록 유도해야 한다. 선의만 요구하지 말고 이해를 배분할 때 민간혁신과 영리성과는 보장된다.

로컬리즘이 또 다른 관제사업이 돼선 곤란하다. 공공발 프로젝트라도 민관협치적인 새로운 대응체계로 완수되는 게 좋다. 달라진 행정접근·주민참여도 권유된다. 즉 뉴노멀에 맞는 로컬리즘을 완성할 절호의 기회다. 간단하고 손쉬운 활성화는 경계 대상이다. 수많은 참여와 복잡한 체계가 활성화에 녹여들 때 로컬리즘의 행복 품질은 높아진다. 시간 앞에 무너지지 않도록 긴 호흡 속에서 작지만 확실한 성과일 때 역내 행복과 순환경제는 달성된다.

차별화된 지역특화적인 창발(創發) 모델을 고민할 시간이다. 226개 기초지자체는 226개의 활성화 모델을 갖는 게 바람직하다. 로컬리즘은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한, 한국사회의 미래지속을 위한 새로운 실험이다. 괴물화된 빗장도시의 구심력을 해제하고, 유령화된 과소마을로 원심력을 강화할 유의미한 아이디어다. 도시가 시골을 먹듯, 과거가 미래를 막아선 낭패다. 로컬리즘은 불행사회를 풀어낼 마지막 카드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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