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번째 시집 '음시' 발표
"오늘의 번민과 절망, 눈물과 아픔이 언젠가 피울 꽃의 거름이 될 것"
시인 함기석(수학과 86) 씨가 지난 2월 일곱 번째 시집 <음시>를 출간했다. 함 씨는 수학과 기하학을 차용한 독특한 상상력으로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선보이며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호평을 받아왔다.
함 씨는 대학 4학년인 1992년에 시인으로 등단해 시와 동화, 산문과 비평 등 여러 분야의 글을 쓰고 있다. <오렌지 기하학>,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디자인하우스 센텐스> 등의 시집을 출간했다. 또한 <숫자벌레>, <아무래도 수상해>, <수능 예언 문제집> 등의 동시집, 동화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함 씨는 이외에도 시론집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본인만의 글을 써내려 가고 있다.
다양한 분야에 도전한 덕일까. 함 씨는 이상시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애지문학상, 눈높이아동문학상 등 다양한 상을 수상했다.
일곱 번째 시집 <음시>를 만나다
하늘에서 어린 돌고래들이 천천히 지붕으로 내려
왔다 폭설이 폭설을 폭설로 지워나가는 이생의 기이
한 겨울밤, 수억 년 전에 사라진 별빛들이 죽지 않은
당신의 눈처럼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수학자 누(Nu) 18> 中
시집 <음시> 의 목차를 ‘공간U, 공간 W, 공간 R, 공간 H, 공간 T’로 분류했는데요. 그 뜻은 무엇인가요?
시집 속의 공간들은 수리 세계의 추상공간이면서 우리의 역사 공간, 사회 공간, 기억 공간, 애도 공간, 심리 공간, 꿈의 공간, 병의 공간, 동심 공간, 예술 공간, 우주 공간이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분리 불가능한 공간 신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로 등단 30년째인 저도 여전히 시는 막막하고 어려워요. 매번 시집을 묶을 때마다 크나큰 에너지의 방출과 짙은 고독을 체험하곤 합니다. 저에게 시는 길들여지지 않는 암흑, 야수의 공간입니다.
<음시>의 ‘공간 T’는 수학자 누(Nu)0~18 시리즈로 19개의 시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연작시(하나의 주제 아래 내용상 관련있게 여러 개 쓴 것을 하나로 만든 시)를 통해 인간의 존재와 운명, 생명과 죽음, 말의 탄생과 소멸, 지구와 우주의 미래 등을 집중적으로 사색하고 성찰하고 싶었습니다. T는 Topology, Time, Today, Tomorrow, Tomb, Truth 등을 떠올리며 시적 상징으로 사용한 기호입니다.
관찰은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발생한 특정한 사건에 관한 것입니다. 말, 인간, 우주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물리 이론을 적용하기도 했고, 기하학적 상상력을 펼치기도 했고 건축과 미술 등 타 예술 장르의 소재들을 결합하기도 했습니다.
'누(Nu)'는 고대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최초의 신, 혼돈의 바다를 뜻합니다. 생명 탄생의 최초 공간으로 카오스 세계관을 펼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되어 차용한 것입니다. 중요한 건 누(Nu)가 남성과 여성의 경계인, 불확정적 양성의 존재, 누구(Who)로만 추정되는 익명의 복수 존재라는 점입니다. 누(Nu)를 단수 동일인이 아닌 복수로 쓰려 했습니다. 현실의 수학자이면서 꿈의 시공간을 유랑하는 미아, 저의 초상들인 셈이죠.
다양한 작품에서 수학과 기하학을 활용하시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래프만 그려져 있는 시들도 있었는데요. 수학과 시를 결합하는 이유와 영감의 원천에 대하여 설명 부탁드립니다.
흔히 시인과 수학자는 대립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 몸이 이 두 대립자가 동거하는 아름다운 신혼집이라 생각했습니다. 수학과 시에서 더 나아가 과학과 예술을 대립개념이 아니라 공존 또는 상생 개념으로 받아들입니다.
음악이나 미술 작업에도 수학적 계산과 추론, 물리학적 구조와 배치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몸은 대칭적 타자들의 집합 공간이라는 점에서 신비의 우주입니다. 좌표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해 평면 좌표계는 수평과 수직, 양과 음, 영(0)과 무한(∞)이 공존하는 사랑의 장소고, 복소수 좌표계는 실수와 허수가 결합하는 혼인의 세계입니다.
좌표계에서 두 축을 시간과 공간, 기억과 망각, 현실과 꿈, 인간과 신 등으로 설정하고 화살표 방향을 임의로 재설정하면 수학의 추상 세계는 우리가 살아왔고 살아가고 살아갈 현실의 물질세계로 바뀝니다. 망각된 주검들을 호출하는 제사와 애도의 자리, 역사 고발과 정치 희롱의 자리, 통곡과 반성의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역사는 특정 시간대 특정 공간에서 발생한 사건들의 궤적이라는 점에서 점 집합 라인으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역사 대신 그 자리에 인간, 사랑, 죽음, 우주가 놓일 수도 있겠지요.
수학과 학생이 시인으로 등단하기까지
시인으로 등단하시게 된 계기와 등단하면서 겪었던 과정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현재의 우리나라 문단에는 대학에서 이과 계열을 전공한 분들이 여럿 계십니다. 의학도 출신 시인, 공학도 출신 극작가, 화학이나 물리학을 전공한 시인, 법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한 소설가 등 다양합니다. 물론 대학을 다니지 않고 좋은 글을 쓰시는 작가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30년 전에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문단에 막 나왔을 때는 수학과 출신 문인은 저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외로웠고 이끌어줄 선배들이 많은 작가들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고립감이 저를 독서와 창작에 더욱 집중시켰습니다. 치열한 예술 창작은 풍요가 아닌 결핍과 목마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함기석 동문의 앞으로의 계획도 궁금합니다.
동시집 원고를 정리 중인데 올봄엔 꼭 마무리하고 몇 년 전부터 천착해오던 장시 집필에 집중할 계획입니다. 요즘 들어 하루하루 주어지는 시간의 가치와 무게감이 이전보다 훨씬 크게 느껴집니다.
한양인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도 여러분도 오늘 이 하루는 먼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까마득한 과거일 것입니다. 아름다운 추억은 아름다운 시간과 풍경과 사람을 품고 있습니다. 해드릴 말이 별로 없습니다. 다만 많이 울고 웃고 사랑하고 방황하세요. 오늘의 번민과 절망, 오늘의 눈물과 아픔이 언젠가 피울 꽃의 거름이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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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

덕분에 좋은 시와 시인을 알아갑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