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매체를 통해 한국 가곡 대중화에 힘써
교육자로서 수많은 유명 성악가 배출

고(故) 신영조 성악과 명예교수가 지난 14일 8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신 교수는 1970~80년대 한국 가곡을 여러 매체에 알리며 한국 가곡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34년 동안 한양대 교수로 재직하며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한국의 가곡을 사랑한 대한민국의 3대 테너, 신 교수를 떠나 보내며 그의 역사를 알아봤다. 

 

▲ 대한민국 3대 태너로 불리는 고(故) 신영조 성악과 명예교수가 지난 14일 타계했다. 그는 한국 가곡의 대중화에 힘썼으며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 여성신문
▲ 대한민국 3대 태너로 불리는 고(故) 신영조 성악과 명예교수가 지난 14일 타계했다. 그는 한국 가곡의 대중화에 힘썼으며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 여성신문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1943년 9월에 태어난 신 교수는 중·고교 시절 야구 선수로 활동했다. 당시 어깨를 다쳐 병상에 누워있던 중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에 빠져들었다. 한양대 성악과를 졸업한 후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6년간 유학했다. 뮌헨 국립음악대학교(Hochschule für Musik und Theater München)를 졸업한 그는 1975년 리우데자이네루 국제 성악 콩쿠르에 입상하며 정상급 성악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오랜 해외 생활을 마치고 1976년 귀국한 신 교수는 국립오페라단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타미노 왕자 역을 맡아 명성을 얻었다. 신 교수는 귀국 이후 TV·라디오 등을 통해 한국 가곡 열풍을 일으켰다. 그는 무대에서 가곡 '산노을', '초롱꽃', '기다리는 마음' 등을 부르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형성했다. 신 교수는 또한 'MBC 가곡의 밤'과 같은 독창회에서 한국 가곡을 부르며 가곡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신 교수는 귀국 직후부터 2009년까지 34년간 모교인 한양대 성악과의 교수로 재직했다. 또한 그는 1991년부터 2006년까지 국내 최초 성악 음악캠프인 '신영조 여름 음악학교'를 운영하며 교육자로서도 힘썼다. 16년 동안 음악 학교를 운영하며 국내 유명 성악가 김우경, 신상근, 이강호 씨 등을 배출했다. 

 

그는 한국 가곡을 독일의 예술가곡인 '리트(lied, 독일어 시에 붙여진 노래를 포괄하는 말)'와 견주어도 손색없을 정도로 수준을 높였던 예술가였다. 신 교수는 한국 가곡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특유의 이미지 해석을 가능케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는 성악과 박인수, 엄정행 씨와 함께 '한국 3대 테너'로 불리며 한국 가곡이 포함된 다수의 음반을 출반했다. 이후 신 교수는 '올해의 음악가상', '한국음악상', '백남학술상', '가곡공로상' 등을 수상하며 국내 유일무이한 성악가로 발돋움했다.

신 교수는 한국 가곡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해석한 훌륭한 음악가였다. 독창회를 열 때면 2부는 한국 가곡으로만 프로그램을 구성할 정도로 한국 가곡을 사랑했던 테너였다. 그는 또한 한양대 성악과에 국내 최초로 '한국가곡문헌' 수업을 개설하며 가곡의 학문화에도 힘쓴 교육자였다.

성대결절이 왔을 때 회복을 위해 2년간 필담으로 의사소통했다는 신 교수의 일화에서 음악을 사랑했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수많은 유명 성악가를 배출했으며 현재까지도 사랑받는 한국 가곡의 열풍을 일으켰다. 일평생 음악을 위한 삶을 살았던 신 교수는 한국의 자랑스러운 테너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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