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자 백남 김연준 박사의 생애

   
 

“내 삶을 돌아보면 큰 두 줄기가 내 뒤로 뻗어 있다. 그 하나가 음악이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는 바로 육영(교육) 사업이다.” 우리대학 설립자 故 백남(白南) 김연준 박사는 자신의 인생을 음악과 교육, 두 단어로 요약했다. 그는 젊은 시절 촉망받는 성악가였다. 전도유망한 음악인으로서 미국 유학을 준비했지만, 일제 말기 불안정한 시국에 떠밀려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인생은 새옹지마라 했던가. 그의 열정은 음악에서 교육으로 옮겨 붙었고, 이는 1939년 우리대학의 모태인 ‘동아공과학원’설립으로 꽃피웠다. 5월 15일 개교기념일을 맞아 인터넷한양은 3000여 가곡을 쏟아낸 작곡가로서, 한양학원의 기틀을 다진 교육자로서 백남 김연준 박사의 생애를 들여다보는 기회를 마련했다.

 

유복한 기독교 집안에서 음악을 접하다


   
김연준 박사는 1914년 함경북도 명천군 출생이다. 명천 땅은 전통적으로 자주 정신과 교육열이 강한 곳으로 전해진다. 수많은 독립군들이 배출되었고, 함북 지역 최초로 개화 교육 기관이 생겨난 곳이다. 후에 자서전에서 그는 이러한 고향의 기질이 자연스럽게 ‘우리 민족’이라는 자주 의식을 체화할 수 있게 도왔다고 밝혔다. 그는 독립군 군사조달임 경력이 있는 거상(巨商) 아버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 삼남 중 막내였다. 무역업을 통해 지역 유지로 자리를 잡았던 아버지는 교회를 짓고 장로로 활동했는데 어린 김연준은 부속 유치원에서 음악을 처음 접했다. 교회에서 부른 찬송가가 그가 품고 있던 음악적 재능에 눈을 뜨게 해준 셈이다.

 

1929년, 김연준 박사는 당대 명문으로 소문난 경성고등보통학교(이하 경성고보)에 입학한다. 경성고보에서 그는 변성기 때문에 성악보다 바이올린 연습에 치중했다. 동급생을 모아 바이올린부를 만들어 교내 행사 등을 돌며 연주회를 가지기도 했다. 단순한 취미를 뛰어넘어 음악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계기는 조국을 떠난 러시아인들의 사연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조국을 떠나 국외로 유랑하던 반(反)소비에트 러시아인들이 자신들의 슬픔과 애환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에 감명을 받고, 동병상련을 느꼈다. 일제강점에 짓눌린 조국의 수모를 목격하고 있던 청년 김연준이 음악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깨달은 것. 그는 “예술이란 필연적으로 세계성을 띠기 때문에 내 이웃과 국제 사회에 나와 내 나라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실증하는 방법”으로서 음악을 믿었다. 이를테면 음악이 민족운동의 구체적인 방법론이 될 수 있기에, 이를 통해 자신은 민족에 이바지해야겠다는 신념을 굳힌 것이다.

 

일제강점 치하, 그 수모의 세월 속에서 성장하다

 

김연준 박사는 젊은 시절 꽤 열혈청년이었던 것 같다. 고보시절의 일화가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조선인 엘리트 양성기관 구실을 하던 경성고보는 일제가 혈안이 돼 예의주시하던 문제학교였다. 자연스레 학생들 사이에는 짙은 항일 분위기가 번져있었다. 어느 날 평소 우리 민족의 열등함을 외치던 일본인 선생이 분실물을 찾는다고 운동장에 학생들을 줄세웠다. 굴욕감을 느낀 조선 청년 김연준은 이에 반발하며 공개적으로 저항했고, 이로 인해 그는 무기정학 처분을 받고 1년 늦게 졸업했다. 조선인 학생이 일본인 선생에게 항거한다는 사실 자체가 엄두가 나지 않던 시절이었다. 당시 피끓는 청춘이었던 그에게 이 사건은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일본이 강국이 된 원동력을 서양의 과학문명을 흡수한 덕분이라고 생각하면서 과학 기술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훗날 '동아공과학원'을 설립하게 된 자각을 이때 얻게 된 셈이다.

 

경성고보를 졸업한 김연준 박사는 오늘날의 대학격인 연희전문학교(이하 연희전문)를 선택한다. 미션계 학교인 연희전문에선 수준 높은 음악 공부를 위한 미국 유학이 쉬울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음악과가 없어 문과로 입학한 그는 당시 조선 음악계를 이끌던 현제명 선생을 만나 성악을 사사 받는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에서 부쳐오는 용돈은 그가 마음 놓고 성악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대학생 김연준이 절대 빼놓지 않았던 주요 일과는 당시 지식인들의 아지트였던 명동 돌체다방에서 음악을 듣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전 세계 성악가들의 목소리를 감상하는 것으로 하루의 절반을 보낼 정도였다. 그는 회고록에 “당시 자장면 값이 5전 정도 할 때였는데 하루에 무려 25전을 다방에 갖다 바쳤다. 25전을 내면 종일 음악을 들을 수 있어, 돈 아까운 줄 모르고 그 다방에 진을 치고 있었다. 반복해서 듣다보면 어느 틈에 발성 방법이 몸에 배는 것을 느낄 정도였다. 세상에 음악처럼 쉬운 것이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적고 있다.

 

교육 사업의 길을 걷다

 

김연준 박사는 당시에는 드물었던 바리톤 독창회를 갖는 등 성악 유망주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일제 말기의 시대적인 가혹함은 피해 갈 수 없었다. 나라 안팎의 불안정한 상황에 맞물려 그의 오랜 숙원이던 미국 유학이 물거품이 된 것. 그러나 일제 강점 하에서 ‘어떻게 하면 민족의 일원으로서 우리나라 독립에 힘이 될 수 있느냐’를 궁리한 열혈 청년에겐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이내 교육 사업이라는 새롭게 가야할 길을 상정해냈다. “갑자기 할 일이 사라진 나에게는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않았다. 좌절감에 빠져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성악을 공부하여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한국 사람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선언하겠다고 마음먹고 이것도 독립 운동의 하나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교육 사업은 그 나름으로 민족의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민족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음악과 교육은 상통하는 것이었다.”

 

 

   

 


교육으로 눈을 돌린 김연준 박사는 그 중에서도 공업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는 것으로 구체적인 가닥을 잡았다.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위해 ‘~쟁이’를 육성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이 때 그의 구세주가 되어준 존재는 역시 아버지였다. 끈질긴 설득 끝에 아버지로부터 3000원을 지원받는데, 오늘날로 치면 20~30억 원에 달하는 거금이다. 1939년, 그의 교육에 대한 열정이 ‘동아공과학원’ 설립으로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음악 밖에 모르고 살던 젊은이가 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외부 환경도 날로 악화일로였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청년들의 입대를 유도하기 위해, 신입생모집 중지명령을 내리고 학교를 폐쇄해 버린 것. 그렇게 1년 반이 지나고 맞이한 광복. 그는 교명을 ‘건국기술학교’로 바꾸고 다시 열정을 불태웠다. 1946년 5월 그는 재단 법인 한양 학원을 설립하고 현재 신당동 한양공업고등학교 부지에 캠퍼스를 마련해 학교를 ‘한양야간공업대학’으로 개편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8년엔 정식 대학 인가를 받아 ‘한양공과대학’이 탄생했다.

 

‘사랑의 실천’, 한양대학교의 탄생

 

한양의 초창기는 녹록치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고군분투하며 학교를 유지한 김연준 박사는 광복 시국에서 대학 승격을 이뤄냈다. 뒤이은 6.25 발발로 피난길에 오르는 바람에 실질적인 대학의 모습은 상경 후 행당산에 부지를 잡고 나서부터 갖춰지기 시작했다. “당시 그곳은 평범한 돌산에 불과했지만, 산 위에 올라서면 시가지와 남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라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10여만 평의 터가 마음에 들었다.” 결국 그는 당시 국유지였던 행당산을 매입한 후, ‘워낙 돌산이라 건축비보다 토목공사비가 더 많이 드는’ 맹렬한 공사 끝에 한양공과대학 캠퍼스를 마련했다.

 

 

   

 

 

   

 

 

   

 

 

1959년, 공과대학에 머물러 있던 한양은 문리과대, 상경대, 정경대를 추가하며 종합대학으로 발돋움한다. 지금의 ‘한양대학교’라는 정식 명칭이 쓰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가 초대 총장에 취임하며 학생들에게 전한 훈사를 보면, 우리대학의 교훈인 ‘사랑의 실천’ 정신의 취지를 볼 수 있다. “종합 대학으로 새로운 출발을 보게 된 오늘의 감개, 오직 무량할 뿐이다……(중략)……발전도상에 있는 한양대학교의 학생임을 자부하라. 대학 교육은 전문적 학문의 연마에 목적이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하나의 인격자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인간으로서 완성된 뒤에 비로소 학문의 가치가 논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학교의 교훈은 ‘사랑의 실천’에 두고 있다.”

의과대학 등을 설치하며 60~70년대 내내 우리대학의 양적인 팽창을 이끈 김연준 박사는 70년대 이르러 내적 충실에 기하는데 중점을 둔다. 서울 인구가 급증하자 정부가 수도권 인구 억제 정책으로 대학의 정원을 동결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가 분교 설립에 관심을 갖게 된 점은 당연지사였다. 그가 사주로 있었던 ‘대한일보’ 폐간과 관련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분교를 먼저 권한 사실도 있다고 전해진다. 당시 안산의 명칭이었던 반월 신도시 건설 계획에 맞춰 그는 42만 평 부지에 ‘반월분교’를 설치했다. 1979년 3개 학과 800명으로 출발한 반월분교는 오늘날 28개 학과, 13000여 명의 학생을 가진 ERICA캠퍼스로 자리매김했다.

 

다시 눈을 뜬 예술혼

 

1970년대를 전후해 우리대학이 어느 정도 안정세에 접어들자, 김연준 박사는 다시금 음악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힌다. 음악가의 꿈을 접어두고, 교육자가 된지 3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냥 머릿속에 맴도는 멜로디를 잡아서 곡을 써 보았다. 작곡을 한 다음에 혼자 흥얼거려 보면 좋은 것 같기는 한데도 그저 위선이고 모방이지 창작은 아니라고 스스로 과소평가 하게 될 뿐이었다.” 틈틈이 써놓은 곡에 대한 장일남 음대 교수의 호평은 그가 자신감을 얻은 계기가 됐다. 그간 음악가로서 재능을 발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그는 휘몰아치며 몰입했고 1년여 만에 100곡을 넘게 써냈다. 이를 토대로 1972년에 서울 시민회관에서 작곡 발표회를 가지기도 했다. 1974년 그의 작품은 600곡을 넘었고, 이 중에는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청산에 살리라’도 포함돼 있다.

 

 

   

 

 

“악상이 마치 분수처럼 떠올랐다. 100곡집을 만들고 작곡발표회를 하면서 나는 음악가로서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음악계에서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내가 한양대학을 설립한 교육자인 줄로만 알고 있었지, 과거에 음악을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놀랄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의 회고처럼 ‘교육자 김연준’과 ‘음악가 김연준’은 분명 다른 사람이었다. 결단력과 뚝심으로 유명한 한양학원 설립자 이면에 ‘우수에 차 있거나 숭고한 종교적 색채가 강한’ 곡을 써내는 황혼의 작곡가로서 그가 서있던 것이다. 김연준 박사의 곡은 허무주의가 서려 있다는 평을 받는 편이다. “아무리 경쾌한 곡을 만들려고 해도 내 음악의 바탕에는 항상 우수가 깔려 있게 마련인 것이다. 인생은 이렇게 허무한 것이니까 우리는 인생을 포기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전달하려 했다.”

 

 

   

 

 

미래를 열어갈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글

 

25세 청춘의 나이에 교육 사업에 뛰어들어 오늘날 우리대학을 일궈내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유수의 곡들을 작곡한 김연준 박사는 한평생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일제강점기, 해방 전후, 군부 정권 등 격동의 한국 근현대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교육’과 ‘음악’ 두 분야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입지전적 인물이 된 성공신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생전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어놓은 글은 적잖은 울림이 있다. “문제는 삶의 목표를 얼마나 높고 고매한 자리에 세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학생들 중에 큰 꿈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신념으로 산 사람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절망을 초월해 나가는 끈질긴 집념과 불굴의 의지와 노력, 이런 것들이 젊음의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음악가로선 노년에 접어들어 빛을 본 김연준 박사는 젊음에 관해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흔히들 인생을 젊음과 중년과 노년으로 구분을 하지만 진정으로 높은 차원의 신념을 가진 사람에겐 영원한 젊음이랄까요? 언제나 불타는 정열 속에서 젊음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 문헌 :김연준, 「사랑의 실천」, 1999, 청문각
              김연준, 「미래를 열어갈 젊음이들에게 보내는 글」, 1994, 한양대학교 출판원
              김연준, 「청산에 살리라」, 2001, 한양대학교 출판부
              김연준, 「이 땅에 큰 사랑이 있었네」, 2009, 한양대학교 출판부

 

   

 

 

 

 

 

 

 

 

 

 

 

 

 

 

 

 

 

 

 

 

 

 

 


김철웅 학생기자 chulwoong7@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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