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수많은 최초의 탄생
1939년, 고 김연준 박사의 ‘과학기술 인재의 양성’이라는 젊은 꿈과 함께 동아공과학원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한양대학교. 일제의 온갖 탄압으로 폐교의 아픔이라는 시련도 겪었지만, 꿈과 희망으로 격동의 세월을 이겨냈다. 그리고 이렇게 75년 역사를 이루었다. 긴 역사 중에서도 만물이 생동하는 3월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오늘의 한양이 있기까지 어떤 노력들이 있었는지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글 송유진 | 사진 한양대학교 DB
1941년 3월
동아공과학원 제1회 졸업
한양대학교의 시초 동아공과학원은 1939년 경성부 경운정 88번지 천도교회관 건물을 배움의 터전으로 하여 문을 열었다. 학제는 2년제의 광산과, 측량과, 토목과 주간부, 무선과 그리고 토목과 야간부로 학생 수 600여 명을 거느리며 학원의 규모를 갖추었다.
동아공과학원은 근로호애勤勞好愛·질실강건質實剛健·견고지구堅固持久·협조호양協調互讓 4대교육 지침을 교육 목표로 삼았다. 이는 근면·정직·겸손·봉사를 요구하는 오늘날 한양대학교의 건학 정신 ‘사랑의 실천’의 시원이다. 동아공과학원의 제1회 졸업생이 탄생한 건 1941년 3월 7일이다. 토목과 주간부 졸업생 65명과 함께 토목과 야간부 44명, 광산과 42명, 측량과 55명 등 동아공과학원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1944년 3월
동아고등공업학원 제1회 졸업식 그리고 폐교
김연준 박사는 1942년 1월 고등교육 과정의 동아고등공업학원을 설립했다. 고등교육이라고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동아공업학원은 전문학교와 같은 수준의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조선인의 고등기술교육에 대해 전문학교 수준의 교육은 허용하지 않고자 했던 일제 관헌 당국은 동아고등공업학원에 1943년 신입생 모집 중지령을 내렸다. 동아고등공업학원은 결국 설립한 지 2년 만인 1944년 3월 제1회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폐교했다.
1959년 3월
한양대학교 초대 총장에 김연준 박사 취임
한양공과대학은 1950년대 말에 이르러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1959년 2월에는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고, 같은 해 3월 21일에는 한양대학교의 설립자 겸 학장인 김연준 선생이 재단 이사회의 추대를 받아 초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김연준 총장은 한양대학교의 종합대학 승격에 즈음하여 “대학 교육은 전문적 학문의 연마에 목적이 있다. 그러나 그전에 하나의 인격자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인간으로서 완성된 뒤에 비로소 학문의 가치가 논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학교의 교훈을 ‘사랑의 실천’에 두고 있다”라는 내용의 훈사를 했다.
1960년 3월
제2교육관 준공
한양대학교는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이후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시설 확충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1960년대에 가장 많은 건물이 지어졌다. 1960년대 전반에는 제2교육관, 인문관, 제4공학관, 중앙체육관을 준공한 데 이어 1960년대 후반에는 음악관, 사범대학, 공업센터, 요업공장을 건설함으로써 행당산은 손색없는 캠퍼스의 모습을 갖추었다. 의과대학 신설에 따라 부속병원을 설치하게 되어 1972년에 부속병원을 개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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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3월
1963년도 필드하키 부문 최우수 단체로 선정
1960년대 들어 학생회가 부활하는 등 대학에 어느 정도 자율적인 공간이 주어지면서 학생들의 과외 활동도 본격화되었다. 체육 활동은 야구, 축구, 농구, 배구, 탁구부가 계속 상승세를 타고 전국을 제패하는 등 활발했다. 한양대학교의 대표적인 체육부 중 하나인 필드하키부는 1962년 4월 한양 구락부로 시작했으나 5월에 다시 필드하키부로 새로이 발족했다. 1964년 3월 대한체육회는 한양대학교를 1963년도 필드하키 부문 최우수 단체로 선정해 표창하는 등 창설 이후 2~3년 동안 필드하키부의 활동은 눈부셨다.
1976년 3월
학칙 대폭 개정
교무위원회는 1976년 3월 17일에 종합시험제, 졸업논문제, 평가제 실시와 관련된학칙을 대폭 개정했다. 개정된 학칙은 부칙을 포함해 12개 조로 되었다. 주요 내용은 종합시험제와 졸업논문제를 실시하는 것을 비롯해 1976년도 입학생부터 평가제를 기존 A~F까지의 6단계에서 A+~F까지의 9등급제(E학점의 재시험제 폐지)로 바꾸고, 만점을 4.0에서 4.5로 올리는 것 등이었다.
1980년 3월
반월분교 개교식
한양대학교는 1979년에 제2캠퍼스 반월분교를 설치 후 1980년대에 들어서서 안정적인 서울·안산 캠퍼스 체제를 구축했다. 반월대학(1982년 반월캠퍼스로 개명, 1987년 안산캠퍼스로 개명)의 설립으로 외형적 규모의 팽창과 함께 질적 성장을 이루며 대학의 지평이 확대되었다. 반월분교의 교사 준공식과 개교식이 거행된 건 1980년 3월 15일이었다. 전년도 5월 17일 첫 삽질을 시작한 지 10개월 만에 드디어 광활한 대지 위에 웅대한 무대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후 서해안고속도로의 톨게이트가 바로 본 캠퍼스에 인접하게 만들어졌다. 서해안 시대에 그 중심체 역할을 다할 지점에 자리 잡고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개교식을 겸한 교사 준공식은 한양대학교의 새로운 도약을 예고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1997년 3월
국제어학원 신설
1990년을 전후해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국제화·세계화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시대를 맞이해 각국의 대학도 글로벌 대학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더는 생존 자체가 어려운 상황으로 되어갔다. 한양대학교는 방안 중 하나로 1997년 3월 10일 국제어학원을 개원했다. 국제화 시대에 걸맞은 다양한 외국어 프로그램을 재학생과 일반인에게 제공해왔으며, 여러 나라에서 유학 온 외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및 한국문화과정을 운영함으로써 내외국인을 위한 언어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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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기사는 한양대학교 대표 매거진 <사랑한대 Vol. 217 / 2014년 3-4월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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