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이 쓴 4종의 일기를 담은 '다산의 일기장'
고전학자 정민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주석을 붙여 완역한 <다산의 일기장>을 출간했다.
정 교수는 총 4426자 분량의 일기를 '다산시문집'과 비교, 대조하며 행간에 깃든 속내를 파헤치면서 임금과 천주교 사이에서 고뇌하던 다산의 모습을 비췄다. 그는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서학과 맞닿아있을 때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지 다산만큼 중요한 사례는 없다"며 "학계 일부에서는 다산이 실학자로서의 정체성을 천주교가 훼손한다 하고, 천주교계에서는 그를 배교자로 보고 있는데 양측에서 배척하는 그 중간에 진실이 있다 생각했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다산의 일기장>에 다산 정약용이 쓴 '금정일록', '죽란일기', '규영일기', '함주일록' 등 4종 일기를 담았다. 1974년 존재가 처음 알려진 4종의 일기는 그동안 번역이나 관련 논문 하나 없었다. 정 교수는 "다산은 일기를 알리바이로써 증거를 남기는 방식으로 전략적으로 일기를 썼다"고 분석했다. 이어 "일찍이 다산이 전국의 천주교 조직과 연결이 있었고, 김복성과 밀거래를 통해 자신은 공을 세우고, 잡힌 이들은 금방 풀려나 면죄부를 받았다"며 "천주교 지도자를 잡아 자수케 했다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배교 활동을 입증한 셈"이라고 했다.
다산의 일기에는 정조가 아끼던 다산을 충청도의 한직인 '금정칠방'으로 좌천시킨 이유도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정 교수는 "탕평책을 펼치던 정조는 남인채제공 그룹을 내세워 노론 벽파를 견제해야 했는데, 채제공 그룹 핵심 참모가 을묘박해에서 사학삼흉으로 지목당한 정약용, 이가환, 이승훈이었다"며 "정약용을 금정칠방으로 보내 여론을 잠재우고, 그에게 재기의 기회를 준 것"이라고 했다.
정 교수는 33~35세 다산이 쓴 일기에는 자신의 업적에 대해서 과대 포장을 하고 예민한 부분은 축소했다고 했다. 그동안 위인으로서의 다산과는 다른 자기 모순적인 인간 다산의 면모가 담겼다는 것이다. 그는 "다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한 시점이다"며 "분노하고 싸우기도 했던 젊은 다산이 있어서 강진 시절 다산이 탄생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산의 시대에도 오늘날처럼 똑같이 치열한 시대였을 겁니다"고 했다.

'한양위키' 키워드 보기